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한때 제임스 핀 가너를 필두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동화 고쳐 쓰기’가 유행했다. 신데렐라가 여성해방운동을 일으킨다는 식의 뒤틀기가 주장하는 바는 이해했으나, 매력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 이야기들에는 고전동화의 핵심이 빠진 것 같았다.
나는 어릴 때 무엇보다 옛 동화들이 무서웠다. 거기에는 잔인한 마법과 폭력이 있었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나약한 인간들이 있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깔끔한 해피엔딩도 아니었다. 성냥팔이 소녀도 인어공주도 죽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어둡고 슬펐다.
824쪽짜리 소설집 『엄마가 날 죽였고, 아빠가 날 먹었네』는 고전동화를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 41편을 모은 책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 존 업다이크, 닐 게이먼 등 쟁쟁한 대가부터 1970년대생 젊은 작가까지 주로 영미권에서 다양한 소설가들이 참여했다.
역시 상당수 글들이 어둡고 슬프다. 그리고 옛 동화처럼 매혹적이다. 작가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불가해한 세상과 그에 휘둘리는 인간의 약한 내면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사람 마음을 스산하게 만들면서도 끝내 사로잡고야 마는 것 같다.
재해석의 대상이 된 동화는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푸른수염 등 익숙한 것도 있고 멕시코나 베트남의 다소 낯선 민담도 있다. 환상문학에 해당할 작품이 많지만, 환상성의 정도는 제각각이다.
티머시 샤퍼트의 「나무의 인어」는 펑크 분위기에 주술을 얹은 기묘한 인어 이야기다. 반면 똑같이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한 캐서린 바즈의 단편 「몸이 사라질 때 소라고둥이 부르는 노래」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두 작품은 모두 남녀의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로, 결말이 인어공주 원작처럼 서글프고 아름답다.
국내 번역서를 펴낸 현대문학의 김현지 단행본팀장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현장에서 탄생한 텍스트의 힘이 컸고, 현대 영미문학의 젊은 작가들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고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살벌한(?) 제목과 두께에도 불구하고 2015년 출간 뒤 지금까지 5쇄를 찍으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현대문학은 『세계의 동화』, 『주석 달린 안데르센 동화집』, 『주석 달린 고전동화집』 등을 펴내는 등 동화 출간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온 출판사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낸 책답게 원서에는 없는 원작 동화의 내용 요약이 뒤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들에게 쏠쏠히 도움이 된다.
김동식 소설집 8권. 독자는 인류의 존망보다 한 커플이 맺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더 신경 쓰게 되고 나는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즈음까지 쓴 소설들 중 이 책의 표제작이 가장 독자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영상화 판권도 팔렸다고.
김동식 소설집 7권. 오늘의유머 사이트가 아니라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한 작품들 위주로 엮었다고 한다. 「김남우 선생의 노량진 이야기」가 섬뜩하고 슬펐다.
김동식 소설집 6권. 1~5편에 실린 작품들에 비하면 다소 긴 글들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대피소에서」 같은 작품은 조금만 살을 보태면 그대로 단편이 될 정도다. 「노인을 위한 금고는 없다」와 「그녀들을 관찰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다」가 아주 쫀쫀하니 재미있었다.
김동식 소설집 5권. 「내가 뭘 사과해야 하는가?」와 표제작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가 따뜻하고 좋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저승이 두렵지 않네. 그건 그렇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콜라! 지금 당장 마트로 달려가 사 드세요!”
김동식 소설집 4권. 처음 함께 출간한 세 권이 엄청난 인기를 끌자 곧 4권도 나왔다. 그래, 나도 저 높은 곳에 계신 그 분의 양심 고백을 들어보고 싶다. 「두 여학생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
김동식 소설집 3권. 「친절한 아가씨의 운수 좋은 날」처럼 개운한 작품도 있고 반대로 찜찜하기 이를 데 없는 글도 있다. 「인간에게 최고의 복수란 무엇인가」와 「거짓은 참된 고통을 위하여」는 두 작품 모두 가장 끔찍한 복수의 방법에 관한 이야기인데 재미도 있고 설득력도 있다.
김동식 소설집 2권. 요괴 이야기가 여러 편 들어 있는데 표제작의 아이러니가 일품이다. 「이마에 손을 올리라는 외계인」은 정체성 정치 시대를 풍자하는 우화로 읽을 수도 있겠다. 「초짜 악마와의 거래」가 유쾌하면서 따뜻했다.
김동식 소설집 1권. 재미있게 읽었다. 출간 직전에 먼저 읽을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작가의 생산성이 이렇게 엄청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작가의 개인사나 책의 출간 과정이 책 내용보다 더 극적인 것 같기도 했다. ‘전에 본 적이 없는 이야기’까지는 아니고, 호시 신이치나 프레드릭 브라운 등이 떠오른다는 게 당시 감상이었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낮에는 알작지 해변 근처의 전망 좋은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작지’는 제주 사투리로 돌멩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해변에는 동그란 알 모양의 돌들이 가득하다. 돌멩이들보다는 한적하고 고즈넉한 느낌이 좋았다. 제주공항 근처라 머리 위로 끊임없이 커다란 비행기들이 날아갔다.
카페에서 우리 뒷자리에 젊은 청년 두 사람이 앉았다. 제주 토박이인 듯했는데, 한 청년의 웃음소리가 안 좋은 쪽으로 독특했다. 그는 자주 웃었는데, HJ가 그들의 대화가 흥미진진했다고 전해주었다. 웃음소리 독특한 청년이 불우한 가정사와 기구한 사업 이야기를 아주 유쾌하게 풀어놓더라나.
점심에는 몸국과 제주식 고사리육개장을 먹으러 갔다. 각재깃국을 파는 식당 근처에 있는 다른 식당이었다. 몸국은 모자반과 돼지고기를 푹 끓인 국이며, 제주식 고사리육개장은 돼지 육수에 잘게 찢은 수육과 고사리, 메밀가루를 넣어 걸쭉하게 만든다. 둘 다 국보다는 고기죽에 가까운 형태라 음식 씹는 걸 귀찮아하는 내가 좋아하겠다고 HJ가 농담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그 두 가지 국물요리가 다 마음에 쏙 들었다. HJ도 마찬가지였다. “제주 여행 다 끝나갈 때 진짜 별미를 먹네” 하고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제주 요리를 목포 요리와도 비교했는데, 우리에게는 제주의 한판승이었다. 목포 요리는 너무 짰다. “그런데 경치도 제주가 목포보다 훨씬 더 좋잖아. 그러면 목포에는 왜 가야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펜션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보리빵과 쑥빵을 샀다. 종류별로 하나씩 샀다. 정우열 작가는 보리빵과 팥보리빵, 쑥빵의 차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는데, 나는 혀가 둔해서 그냥 다 잘 먹었다. 심심하고 구수했다. 제주 요리가 싱거운 이유가 궁금해 검색해 보니, 의외로 과거에 소금이 귀했다고 한다.
해가 진 다음에는 바닷가를 조금 걷고 펜션 근처의 롯데리아 매장에 갔다. 밤거리에 외따로 떨어져 조명을 밝힌 한 층짜리 창문 큰 건물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풍경과 비슷하다며 HJ가 가보고 싶다고 한 곳이었다. 막상 폐점 한 시간쯤 전에 들어간 매장은 그림 《밤을 새는 사람들》의 정취와는 딴판이었다.
아르바이트 직원이 의자를 올리고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고, 가게는 테이크아웃 주문을 하러 온 손님들로 붐볐다. 스피커에서는 신나는 K-팝이 흘러 나왔다. 우리는 허탈하게 웃으며 사각새우더블버거 세트를 시켜 먹었다. 롯데리아는 역시 새우버거지.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보냈다.
프랑스 철학자 올리비에 프리올의 『노력의 기쁨과 슬픔』을 읽었다. 추천사를 의뢰 받은 책인데 앞부분을 조금 읽어보니 흥미가 생겨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내용이기도 했다.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버리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하며, 어떤 일이나 상태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에만 이룰 수 있다.
이번 제주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아침에 짐을 싸고 HJ가 가보고 싶어 한 펜션 옆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복고풍으로 센스 있게 내부를 잘 꾸민 가게였는데,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카페 이름은 ‘니모메’인데 제주 방언으로 ‘너의 마음에’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전 10시 50분까지 카페에 있다가 펜션에 와서 체크아웃을 하고 택시를 불러 제주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은 한 달 전 제주에 도착했을 때와 달리 무척 북적였다. 대합실에서 전날 산 보리빵과 쑥빵을 먹고, 편의점에서 스팸계란김밥을 사서 먹었는데 맛있었다. 면세점에서 혹시 제스피 맥주를 팔지 않을까 했는데 고가 주류만 팔았다. HJ는 제주공항에서만 판다는 땅콩과자 메뉴를 발견하고 사려고 했으나 품절이었다.
비행기는 제 시간에 출발했고, 제 시간에 도착했다.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왜 우리는 술에 빠지는 걸까』와 『던바의 수』를 완독했다.
『왜 우리는…』을 쓴 하종은 작가는 알코올중독 치료 전문병원에서 오래 일한 정신과 의사다. 앞부분을 넘길 때만 해도 술을 왜 이렇게 악마화 하느냐며 속으로 투덜거렸는데, 온갖 끔찍하고 비참한 사례와 피폐한 환자와 그 가족들의 모습을 읽다 보니 뼛속 깊이 무서워졌다.
책은 절주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며 알코올 중독에 대해서는 오로지 단주만이 답이라고 완강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몇 달 정도 술을 안 마실 수 있다고 해도 알코올중독은 알코올중독이라고 한다. 책 앞부분에는 여러 종류의 알코올중독 자가진단 문항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나는 중등도(中等道) 알코올 사용 장애에 해당했다.
『던바의 수』는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의 과학 칼럼 모음집이다. 나는 그가 제안한 ‘던바의 수’와 사회적 뇌 가설 개념 자체에 관심이 있었는데, 꼭 그에 해당하지 않는 주제에 대한 글들도 많았다. 일부일처제가 뇌를 발전시키는 큰 진화적 압력이 되었을 거라는 얘기가 흥미로웠다.
김포공항에서는 지하철을 타고 집까지 왔다. 한 달 만에 돌아와 본 집은 조금 낯설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컸나? 우리 집이 이렇게 병원처럼 희었나? HJ도 나와 똑같이 생각했다고 한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내부는 깔끔했지만 바닥에는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다. 가습기를 틀었더니 물이 새서, 강제로 물청소를 하게 되었다.
저녁에는 치킨을 배달 주문해서 먹었다. 들뜬 기분인 나는 HJ에게 밖에 나가서 술집에 가자고 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이후로도 이틀 동안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반면 나는 다음날부터 매일 외출했다. 주로 새롱이를 만나러 부모님 댁에 간 것이었지만.
치킨을 먹을 때에는 스팀 브루의 임페리얼 IPA와 다른 맥주들을 함께 마셨다. 스팀 브루는 독일 아이히바움 양조장의 서브 브랜드인데, 젊은 층을 겨냥해 스팀 펑크풍의 세계관을 개발하고 그 이야기의 캐릭터 일러스트가 그려진 맥주들을 내놓고 있다. 나는 이런 식의 브랜드 스토리들이 유치하다고 느끼는데, 요즘은 그런 게 먹히나 보다. 맥주업계든 어디든. 맛은 임페리얼 IPA 치고는 좀 밍밍했다.
뭐든 차고 넘쳐서인가
스토리가 있어야 지갑을 연다네
그림은 예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