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지난 회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소개하며 예고한 대로 이번 회 벽돌책은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다. 똑같이 책에 대한 책이고 환상의 세계가 배경인데,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반면 『끝없는 이야기』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보다 복잡하게 얽힌다.
짧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책을 읽다가 읽던 책 속으로 들어가 등장인물들과 함께 모험을 벌이는 소년 이야기다. 약골 청소년이 다른 세계에 가서 초능력으로 ‘깽판’을 치는 소원성취 오락물의 쾌감도 담뿍 담겨 있다. 그런데 뒷부분에서는 꼭 그 반대인 주제를 다룬다. ‘픽션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늘 좋은 일인가, 허구와 현실은 어떤 관계여야 하나’를 진지하게 묻는다. 어떻게 보면 다독가, 애서가를 이렇게 추켜세우고 동시에 이렇게 신나게 놀려대는 소설도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2차 세계대전 뒤 누보로망을 주창한 프랑스 작가들과도 닿아 있지만, 엔데의 소설은 청소년 독자의 눈높이를 유지하면서 여러 층에서 감동적인 서사를 풀어 간다. 국내 번역서를 펴낸 비룡소의 박지은 편집장은 “한 소년이 환상 세계를 구해가는 영웅담이자 치유의 이야기이고 한편으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1984년 영화 《네버엔딩 스토리》는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흐뭇하게 추억하는 작품이다. 주제가도 인상적이고. 그러나 소설의 앞부분 절반만 다루기에 원작의 심오한 고찰은 빠졌다. 엔데가 자기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며 영화 제작자들을 공개 비난한 것도 이해가 간다.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이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 속의 책을 계속 언급하고 묘사하는 구성이므로 편집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들고 있는 책이 바로 그 책 속의 책이라는 느낌을 독자에게 줘야 하므로. 표지와 디자인, 레이아웃에 공들인 비룡소 번역본은 그런 점에서 아주 흡족하다. 비룡소에서도 처음에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세 권으로 나눠 발간했다가 2003년에 소설 속에서 묘사된 것처럼 한 권으로 합쳤는데, 역설적이게도 700쪽이 넘는 두께가 된 뒤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이 번역했다.
헬리오스의 딸이자 메데이아의 고모이고 오디세우스와 동거했던 그 키르케가 주인공이자 화자다. 데뷔작인 『아킬레우스의 노래』가 습작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인 소설이다. 막장 서사시 『텔레고네이아』가 이렇게 근사한 치유의 이야기가 되다니. 오디세우스가 등장한 다음부터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파트로클로스를 화자로 내세웠고, 그와 아킬레우스를 세상을 막 알아가는 십대 동성 연인으로 그렸다. 테티스는 무섭고 집착이 강한 어머니, 파트로클로스는 싸움을 조금도 할 줄 모르는 의료인이 되었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애인이 남성인데도 여성문학상을 받았다. 저자의 전공이나 직업을 생각해보면 BL 팬픽 같은 느낌이 좀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모든 문장이 흡인력이 있고 결말은 가슴 저렸다.
성공한 이들의 확신 가득한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어째 세뇌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이 되려고 이런 책을 읽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앞부분은 꽤 후끈한 분위기로 책장을 넘겼는데 뒤로 가니 열기가 좀 가라앉긴 한다.
온다 리쿠의 데뷔작. 중반은 재미있는데 초반이 어수선하고, 결말은 다소 허탈하다. 이야기의 중심인 ‘사요코 전설’이 너무 복잡하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뒤숭숭한 꿈 같달까.
유령의 집을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집인데, 글들의 분량이 짧고 대화체라 소설집이라기보다는 괴담집에 가깝다. 실제로 괴담 전문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이라고. 내용은 대부분 ‘알고 보니 내가 범인(유령).’
소설에 대한 소설, 다층구조 소설을 이야기할 때 내게는 기준이 하나 있다.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보다 뛰어난가’이다. 감탄하며 읽었고, 그 뒤로 온다 리쿠라는 이름을 절대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개구리 남자가 돌아왔다는데 책을 펼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방법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인물도 줄거리도 전작에서 이어지며, 전작을 읽지 않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고테가와 형사는 이번에도 험하게 구른다. 반전은 예상했던 딱 그것.
읽는 내내 현실성을 고민하기는 했다. 어떤 사건은 그냥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았고, 일본 경찰이 저 정도로 무능할 것 같지는 않았고, 작품 속 일반 대중의 반응도 지나치다 싶었다. 그러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허술한 것 같기도 하고 치열한 것 같기도 하고 가학적인 것 같기도 하고 성찰적인 것 같기도 하다. 고테가와 형사가 몸이 튼튼해서 다행이었다.
책에 대한 책을 좋아한다. 내게는 사람보다 책이 편해서, 책에 대한 책을 읽을 때면 마음이 배로 편안해진다. 책 이야기하는 책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 두 권은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와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다.
이 두 책은 소재 외에도 닮은 데가 많다. 둘 다 독일 작가가 썼고, 판타지 소설이자 사변소설이고, 2부로 구성됐고, 청소년 독자를 겨냥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깊이가 상당하고, 분량도 두툼하고, 그럼에도 아주 재미있다. 뫼르스는 엔데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두 책의 한국어 번역서는 분권돼 출간되기도 하고 단권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양쪽 모두 한 권짜리 개정판은 700쪽이 넘는다. 책의 삽화나 인쇄 방식에 저자가 깊숙이 간여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두 벽돌책을 2회에 걸쳐 한 권씩 소개해도 될까? 내게 좀 더 각별한 『끝없는 이야기』를 다음 회로 미루고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먼저 얘기하자면, 이 책은 애서가들에게는 천국 같은 가상도시, 부흐하임(Buchheim·책의 집)에서 펼쳐지는 모험담이다.
여기서 ‘천국 같다’는 말은 좋은 일만 일어나는 장소라는 의미가 아니다. 무서운 음모와 범죄가 벌어지지만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 책이 있다는 얘기다. 책이 푸대접 받는 21세기 한국과 달리, 부흐하임은 책이 최고의 이슈가 되는 사회다. 인쇄소, 종이공장, 잉크공장이 빽빽하고 서점이 수천 곳 있고 어디서나 낭독회가 열리며 고서 사냥꾼은 영웅이 된다.
그래서 부흐하임의 작가와 출판인과 평론가가 서로를 속이고 물어뜯는 묘사를 읽다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현실 문학계와 출판계에 대한 풍자임을 알면서도, 그런 싸움이 그렇게 중요하게 다뤄지는 그곳이 오히려 부러워지기도 하니까.
책의 큰 특징인 동화풍의 상상력과 능청스러운 유머에 대해서도 상반된 감정이 드는데, 처음에는 살짝 가볍게 느껴지다가 나중에는 그 기발함과 풍부한 상징성에 압도될 지경에 이른다. 참고로 이 소설 주인공은 두 발로 걷는 작가 지망생 공룡이다.
소설은 뒤로 갈수록 점점 어둡고 무거워지며, 마지막에는 ‘문학의 감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 질문에 가장 인상적인 답을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책이기도 할 것이다. 이 소설은 같은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차모니아 연대기’의 한 편이지만, 시리즈의 다른 책을 읽지 않아도 독서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