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오웰의 소설 중 『1984』와 『동물농장』 다음으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이 영국령 버마를 지배하고 버마족의 민족주의 운동을 한창 탄압하던 1930년대에 영국 작가가 이런 글을 써서 출간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당연히 오웰이 제국 경찰로 일했던 시기의 경험이 잔뜩 담겼다. 주인공 존 플로리는 제국주의를 증오하는 자신이 식민지에서 지배 계급으로 살기 때문에 말과 생각이 억압당하는 역설을 고찰한다. 그는 코끼리를 잘못 쏘아 죽인 적도 있다. 그렇다고 플로리가 고귀한 영웅인 것은 전혀 아니며, 오히려 그 정반대에 해당한다. 사실 오웰은 이 소설에 나오는 영국인과 미얀마인 어느 누구도 고귀하게 그리지 않았다.
주인공 고든 콤스톡이 품는 열패감, 여성혐오적 발언, ‘샴페인 좌파’에 대한 경멸과 선망에 2020년대 한국 풍경이 그대로 겹쳐진다. 오웰은 어떤 면에서는 2020년대 한국 작가들이 감히, 혹은 차마 넘지 못하는 선을 용감하게 건넌다. 출간 당시에는 야만적이라거나 폭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오웰 사후에 찬사를 얻었다. ‘제게 고결함을 주지 마소서, 오 주여, 제게 돈을 주소서.’
오웰이 쓴 시사 칼럼들을 모은 책이라서 다른 산문집과 겹치는 글이 별로 없다. 시사칼럼에서 특정 인물이나 이슈를 비판할 때 오웰은 보다 신랄해진다. 그가 전쟁보다 더 싫어했던 것은 위선이었다. 저출생 문제나 저널리즘의 역할, 세계화, ‘잔혹 포르노’, 예술가의 생계 지원 등 다루는 주제가 2020년대에도 조금도 낡아 보이지 않아서 놀랍다.
표제작 「코끼리를 쏘다」는 거의 모든 조지 오웰 산문집에 실려 있다.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영국적 살인의 쇠퇴」 때문인데, 오웰은 여기서 1944년에 있었던 ‘턱 보조개 살인사건’을 말한다. 오웰은 이 사건이 별로 오래 기억될 것 같지 않다고 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오웰 덕분에 유명해져서 지금도 이야기된다.
표제작 「책 대 담배」를 읽으면 오웰이 얼마나 책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시시콜콜하게 원고를 쓰는지 알 수 있다. 「어느 서평가의 고백」을 보면 돈 받고 좋은 서평 쓰는 걸 그렇게 혐오했으면서도 꾸역꾸역 써냈던 그에게 짠한 마음도 인다. 동료 사회주의자들과 갈라질 수는 있어도 추천사 고료는 거절하지 못했던 건가.
튀고 싶어 하는 이들일수록 자세와 분위기만 도발적이고, 정작 하는 말의 내용은 의미 없고 따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조차 남들 얘기를 이것저것 짜깁기한다. 사람도 책도 그런 부류가 넘쳐나는 시대다.
벽돌책을 읽어서 좋은 점 하나는 그런 치들을 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제작비가 많이 드니까 출판사들이 원고를 신중하게 고른다. 그리고 대체로 긴 글은 깊은 사유 없이 쓰기 어렵다.
760쪽 짜리 존 그리빈의 과학사 서적 『과학』은 사람으로 치면 묵직한 주제를 차분하고 점잖게 설명하는 신사다. 이 책의 논쟁적인 면모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과학사를 다룬다면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과학사가 아닌 영역, 예컨대 고대 그리스나 동양의 업적은 거의 언급도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토마스 쿤이 주창한 과학혁명 개념을 ‘과학의 막장에서 전혀 일해본 적 없는 사회학자들이 좋아하는 신화’(560쪽)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책은 시종일관 이런 견지인데, 과학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사건은 양자혁명 딱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관점은 기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과학은 연구 결과가 쌓여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공동 작업이라는 생각이다. 저자가 인정하는 예외적 천재는 아이작 뉴턴이지만, 뉴턴이 없었어도 그가 한 일을 몇 십 년쯤 뒤에 누군가 해냈을 거라고 한다.
영웅도 혁명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흥미진진한 ‘사람들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자신 천체물리학자인 저자는 자연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좌절하면서 동시에 돈과 안전과 명예를 추구하고, 누구보다 인정에 목마른 과학자들의 초상을 세심히 그린다.
데카르트는 과학계에 심오한 영향을 남겼지만 진공을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18세기 초까지 후학들을 헷갈리게 했다. 퀴리 부인은 훌륭한 과학자였지만 그녀가 받은 노벨상 두 개는 사실 같은 연구에 대한 중복 수상이었다. 멘델과 다윈은 그저 운이 좋았던 아마추어가 결코 아니다. 로버트 훅과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경쟁자를 잘못 둔 덕에 지금까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앞서 말한 논쟁적 관점에 주의를 기울이며 읽는다면 풍성한 선물꾸러미 같은 교양 도서다. 종교재판관의 눈치를 살피며 진행해야 했던 과학 실험들이 젠틀맨 계급의 호사스러운 취미가 되는 과정, 천문학, 물리학, 지질학, 생물학 같은 분야가 서로 주고받은 영향도 흥미롭다.
오웰은 다양한 주제와 소재로 칼럼을 많이 썼는데, 한국에서는 여러 출판사가 그 글들을 중복해서 펴냈다. 이 책 한 권이면 「코끼리를 쏘다」나 「교수형」, 「나는 왜 쓰는가」 같은 묵직한 글부터 「“물속의 달”」 같은 가벼운 에세이까지 중요한 글은 대부분 읽을 수 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책이다. ‘정치적이지 않은 글쓰기는 없다’는 말은,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의미라고 이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이 논픽션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오웰의 첫 소설이자 자전소설이라고 한다. 상당 부분 경험담인 건 분명한데 얼마나 허구가 가미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논픽션으로 분류했다. 하여간 어마어마하게 웃기는 책이다. 비참한 생활을 묘사하는데도 깔깔거리며 읽게 된다. 마지막에 화자가 말하는 교훈도 강력하다.
막장의 풍경과 탄광 노동자들의 삶은 너무 끔찍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탄광 노동자들은 거기에 항의하지 않는데, 오웰은 그들이 ‘신비로운 권위’에 짓눌려 있다고 탁월하게 통찰한다. ‘끔찍한 전문용어’를 구사하는 ‘자의식 강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도 통렬하다.
오웰은 적이 뚜렷한 작가였다. 그 적은 바로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였는데 그의 인생 단계에서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1930년대 후반 유럽 세계에는 이전에는 보지 못한 거대한 인간 억압 체제가 나타났다. 파시즘이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고 전쟁의 비루함을 알았고 ‘우리 편’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적과 자신에게 같은 잣대를 적용했으며, 비범한 유머 감각도 상당 부분 거기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