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몇 년 전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를 감명 깊게 읽고 여기저기 추천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그사이 제법 알려졌으니 이제 루이즈 애런슨의 『나이듦에 관하여』(비잉)를 추천하고 다니련다.
두 책은 닮은 데가 많다. 웬만한 작가보다 글을 훨씬 더 잘 쓰는 의사들의 저작이다. 현대의학이 삶의 뒷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병원 이야기를 병원 밖 담론으로 확장한다. 독자 개개인에게 꼭 필요한 실용적인 조언과 사회 전체가 귀담아들어야 할 제안이 함께 가득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물론 있는데, 우선 『나이듦에 관하여』는 번역서 기준 844쪽으로 두께가 두 배쯤 된다. 외과 의사이자 남성, 하버드대 의대 교수인 가완디와 달리 애런슨은 젊은 여성 연구자로 노인의학이라는 영역을 개척해 나가며 수많은 고충을 겪었고, 그 사연을 책에서 진솔하게 푼다.
무엇보다 두 책이 다루는 인생의 시기에 다소 차이가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삶의 마지막장에 초점을 맞추고, 『나이듦에 관하여』는 노년이라는 보다 긴 기간을 전체적으로 살핀다. 노년은 죽음보다 복잡하다.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있어도, 노화에 대해서는 그러기 힘들다.
책을 읽으며 노인들이 얼마나 약자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들은 대체로 투명인간이다. 병원에서는 아무리 아파도 환영받지 못한다. 의사들은 노인의 몸에 대해 잘 몰라 과잉치료하기 일쑤다. 책의 표현을 빌리면, 노인들에게는 세상의 잣대 자체가 너무 높다. 짧은 보행자 신호, 지나치게 밝은 실내조명,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디지털 기술……. 그러다 떨어진 청력 때문에 경찰의 지시를 제대로 듣지 못하면 사살될 수도 있다.
그래, 한국에서 총에 맞을 일은 없겠지. 하지만 이 나라가 노인 자살률과 노인 빈곤률이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라는 점을 명심하자. 노인 인구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라는 점도. 그런 면에서 모든 부처의 고위 공무원들부터 의무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노인이 살기 좋은 방향으로 사회를 재설계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저작을 읽을 때마다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의무감을 갖고 도전한다. 『괴델, 에셔, 바흐』는 안나푸르나처럼 가파른 험산(險山)이었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과 함께 쓴 『이런, 이게 바로 나야!』는 오르는 재미가 있는 설악산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심리학자인 에마뉘엘 상데와 함께 집필한 『사고의 본질』(아르테)은 일본의 후지산 정도에 빗댈 수 있겠다. 후지산은 높이에 비해 등반이 어렵진 않고, 막상 가보면 풍경은 소박하다는 평이다. 이 책도 심오한 주제를 768쪽에 걸쳐 다루지만 내용 자체는 교양서 독자가 무난히 따라갈 수 있다. 다만 호프스태터의 다른 책만큼 전개가 현란하지는 않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사고의 본질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범주화와 유추다.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물, 관계, 개념에 수없이 많은 라벨을 붙인다. 그런 범주화를 통해 그들 사이의 유사성을 알아차리며, 새로운 개념도 유연하게 탐구할 수 있다. 사고의 도약도 그렇게 일어난다.
갈릴레오는 목성과 목성의 위성과의 관계가 지구-달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목성의 위성과 달을 ‘더 큰 천체 주변을 공전하는 작은 천체’라는 범주로 묶자 거기에 지구도 속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이는 어린아이가 ‘식물’이라든가 ‘자동차’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습득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나는 앞에서 어려운 책과 가파른 산을 한 범주로 묶었다. 독서와 등산을 한 범주로 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직접 체험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없는 일’로 말이다. 위의 짧은 요약이 이 책을 다 설명해준다고 결코 오해 마시길.
미국인과 프랑스인 학자가 함께 쓴 이 책은 영어판과 프랑스어판이 동시에 원본이기도 하고 둘 다 번역본이기도 하다. 심지어 두 판본이 내용도 조금 다르다. 사례들을 각각의 언어권 독자들이 더 이해하기 쉽도록 다르게 든다. 저자들은 한국어 번역본도 그렇게 고쳐달라고 요청했고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은 재번역까지 요구했다고 한다.
더글라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책세상)는 평양냉면 같은 책이다. 이 소설에 대해 몇십 분이고 수다를 쏟아낼 수 있는 열혈 팬들이 있다. 반면 ‘나는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던데’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꽤 있다. 그래서 추천하기가 다소 조심스러워진다. 취향을 타는 책이다.
게다가 이 작품의 재미가 시치미를 뚝 떼고 현란하고 능청스럽게 풀어놓는 유머에 있기 때문에 이걸 제대로 소개하기가 지극히 까다롭다. 이 SF 소설의 우주적 농담은 혼자 읽을 때는 배꼽 빠질 듯 웃기지만 그걸 남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원래 농담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특히 복잡하고 지적인 농담일수록.
“진짜 유머가 끝내준다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우주 종말 직전의 미래로 갈 수 있다고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거기 종말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이 모여 있겠지? 자기 종교의 예언이 실현되는지 확인하려는 교인들도 와 있을 테고 말이야!” 이런 말을 한참 떠들면 상대는 어김없이 ‘얘는 왜 흥분해서 지 혼자 웃고 난리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때로는 농담으로만 닿을 수 있는 진실도 있다. 너무 단순하고 심오한 질문의 답은 태양처럼 맨눈으로 똑바로 볼 수 없고, 그렇게만 간신히 가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것. 『은하수를…』에 따르면 그 메시지는 어느 먼 행성의 산맥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책으로 확인해 보시길. 읽어보면 ‘그래, 이거야’ 하고 수긍하게 된다.
『은하수를…』은 국내에 모두 여섯 권이 번역됐는데, 마지막 6권은 애덤스가 사망한 뒤 다른 작가가 집필했다. 낱권으로도 판매하지만 애덤스가 쓴 원래의 1~5권은 합본판으로 구입할 수도 있다. 1236쪽에 무게가 1.68kg인, 그 자체로 약간 농담 같은 책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들고 다니나 싶은데 의외로 이 합본판이 인기가 좋아서, 2005년 출간 이후 3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최근 3년간 판매 수치는 합본판이 시리즈 1권보다 오히려 더 높다고.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살림출판사)는 1권이 760쪽, 2권이 840쪽이다. 책이 출간된 해에 뉴욕타임스가 올해의 책으로 뽑았고, 미국 잡지 내셔널 리뷰는 무려 20세기 100대 도서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20세기를 다룬 20세기 역사서다. 초판이 나온 지는 거의 40년이 되어간다. 지금 읽어도 괜찮은 책인가?
그렇다, 어쩌면 저자의 통찰은 지금 더 유효할지 모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유 중 하나는 폴 존슨이 요즘 보기 흔치 않은 보수 성향의 역사가라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지식인 사회의 주적으로 자리 잡은 시대에, 20세기의 여러 사회주의 실험들이 빚은 참상과 그 원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읽는 일은 지적 균형감각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될 테다.
저자는 소련의 대숙청, 중국의 문화대혁명, 제3세계 운동을 나치즘, 파시즘과 같은 틀에서 읽어낸다. 인간 본성을 얄팍하게 이해하고, 낭만적이지만 비현실적인 비전을 세운 뒤 그 틀에 사람을 구겨 넣으려 했던 사회공학이라는 점에서다. 책의 표현에 따르면 ‘20세기의 경험은 유토피아주의가 폭력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대를 떠나 사회 진보를 꿈꾸는 이라면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이다.
그런 시사점들을 떠나서도 읽는 맛 자체가 좋다. 문장들은 쉬우면서도 신랄하다. 국제연합 사무총장을 우체국장에 빗대고 구조주의를 ‘엘리트들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지식의 체계’라고 꼬집는 식이다. 특히 권력자들의 초상을 생생하게 잘 그리는데, 몇몇 인물에 대해서는 과감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간디를 정치적 기인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을 다 읽고 나면 반박이 쉽지 않다.
『모던 타임스』는 심만수 살림출판사 대표가 미국 뉴욕 출장을 갔을 때 반스앤노블의 폴 존슨 특별판매대에서 읽고 출간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살림출판사는 『미국인의 역사 1, 2』 등 이 저자의 다른 주요 저작들도 출간했다. 출판사 측은 “분량이 만만치 않은 책들인데도 꾸준히 팔린다”며 “한국에 폴 존슨의 고정 독자층이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요즘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가 위기이며, 그때 병적인 징후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지금이 그런 때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도, 세계도.
죽어 가는 낡은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맞아야 할 새 ‘것’은 어떤 모습일까, 막연하게 상상만 한다. 여기서 ‘것’은 단순히 법률이나 제도, 문화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 듯하다. 어떤 사상, 최소한 치밀한 담론 정도는 돼야 하지 싶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732쪽짜리 벽돌책 『현대의 탄생』(책세상)을 만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단히 흡족한 독서였다. 그 만족의 상당 부분은 명쾌함에서 왔다. 박학다식한 두 저자, 스콧 L. 몽고메리와 대니얼 치롯은 현대가 네 가지 사상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진화론,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 오늘날 세계 질서를 구성하는 심오한 신념 체계들이다.
이 생각들은 모두 근대의 발명품으로, 탄생부터 지금까지 여러 학파를 낳았고 상충되는 해석이 있어 왔다. 내적인 한계나 모순도 있었고 악용되기도 했고 때로 끔찍한 부작용도 일으켰다. 저자들은 1부에서 애덤 스미스, 칼 마르크스 등 사상의 창시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야심, 본래의 텍스트, 이후의 영향과 비판점을 살핀다.
이 사상들은 이제 ‘낡은 것’일까? 책의 2부는 이런 계몽주의적 자유주의 기획에 반발했거나 현재 충돌 중인 반동사상들을 다룬다. 파시즘, 내셔널리즘, 근본주의 종교 등이다. 그런데 그 뿌리와 철학적 근거들을 살필수록 이들 반계몽주의 사상이 ‘새 것’이 될 수 없음은 명확해진다.
결론에서 책은 인문학이 왜 중요한지를 강조하는데, 여태껏 수없이 들어온 같은 내용의 주장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었다. 우리에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사상들의 근거와 배경을 공부해야 그걸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세계의 많은 부분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저자들은 종종 이성을 악의 원천쯤으로 여기고 계몽주의를 거부하려는 듯 보이는 최근 인문학의 경향에 대해서도 짧지만 쓰게 한 소리 한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거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세상은 망한다. 그런데 현재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 즉 자본주의가 그 대응을 막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바꿔야 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은 그게 기후 변화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열린책들)는 789쪽에 걸쳐 그 근거와 현장을 제시하는 책이다. 독자에게 핵심 의문은 ‘왜 기후 변화 대응이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거지?’일 거다. 관련 질문도 꼬리를 물고 떠오를 것이다.
기후 변화가 우리 사회의 근본을 뒤집어야 할 정도로 급박한 문제는 아니지 않나?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처럼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시장 원리를 이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화석연료를 덜 배출하는 제품이나, 아예 온난화를 막는 미래 기술로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시장경제를 무시한 사회적 실험들은 모두 실패로 끝나지 않았던가?
클라인은 위 문단의 질문들에 대해 ‘모두 아니오!’라고 답한다. 촌각을 다투는 사안이며, 탄소거래제는 처참히 실패했고, 인공 화산재로 햇빛을 막자는 등의 ‘지구공학’ 아이디어는 미친 과학자들의 헛소리이고, 그보다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시동원 체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오히려 이걸 현재의 기업자본주의를 손볼 기회로 삼자고.
과격하고 급진적이며, 스스로 그렇다고 말하는 책이다. 이제 현재의 경제 시스템과 정면충돌하는 해법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임신 경험을 말하는 한 대목을 제외하고는 감성에 호소하지 않으며, 냉철하게 논리를 전개한다. 충격적인 제안에 대해 책장을 덮을 때까지 확신이 서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마음은 상당히 흔들릴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같은 문제에 대한 다른 시선이 궁금해졌다면 역시 저널리스트 작가인 맥켄지 펑크의 『온난화라는 뜻밖의 횡재』(처음북스)를 권해본다. 기후 변화 위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임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이용할 부분은 이용하자는 태도다. 지구공학에 대해서도 추진하는 측이 펼치는 의견을 소개해준다.
보그에서 ‘위스키’를 주제로 청탁을 받아서 짧은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제목은 <인어공주 옆에서>라고 지었어요.
저는 술은 맥주만 마시니까 ‘위스키를 소재로 에세이를 써주세요’라는 청탁이었다면 정중히 거절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소설은 술술 써지네요. 좋은 위스키 마시는 기분으로 즐겁게 썼습니다.
원문 링크는 아래에 적었습니다. 링크된 웹페이지로 가보시면 저 말고도 김금희, 김연수, 정대건, 천선란, 조해진, 편혜영, 김기태 작가님이 위스키를 주제로 쓰신 초단편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인어공주 옆에서>
“전하, 나날이 더 젊어지시는 거 같습니다. 젊어지실 뿐 아니라 더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습니다. 로렐 공국도 전하의 영도 덕분에 나날이 부강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대공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그렇게 말했다. 대공은 집어치우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사는 나날이 뻔뻔해지시는군요. 거짓말 실력도 나날이 느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리를 내드리고 싶었는데, 아무 데나 대충 앉으세요.”
이 일대 모든 왕국과 공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여성 군주, 어쩌면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군주일 상대가 말했다.
대공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턱 끝으로는 자기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고,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다시 인사를 한 뒤 그 자리에 앉았다.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외교관이라서 좋아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외교관치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편이죠. 가끔 귀국의 공작에 대한 이야기에 거짓말을 섞는 점만 제외하면 정보력도 대단하고, 분석력도 탁월하고요. 그래, 오늘은 무슨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까?”
“제가 아는 최고의 정치 외교 분석가로부터 그런 칭찬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이 말씀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전하.”
진심이었다. 주변국 대사들을 오히려 자기 정보원으로 삼는 대공의 대담함과 노련함에 나는 늘 감탄했다. 하지만 여러 대사들 중에서도 이렇게 밤늦은 시각에 그녀와 독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나뿐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내가 만약 로렐 공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대공을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모시고 있는 공작에 대해서는 그 정도 마음은 품고 있지 않다.
우리는 주변 국가들의 정세에 대해 1시간가량 토론했다. 대공의 분석은 이번에도 날카로웠으며, 그녀의 질문은 핵심을 찔렀다. 그녀는 바이에른과 프랑켄이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전쟁을 벌일 것 같지는 않다고 봤고, 그보다는 오히려 작센의 후계자가 누가 되느냐가 폭탄 같은 문제라고 판단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녀는 슈바벤과 로타링기아의 협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우리는 잠시 논쟁을 벌였다. 아무래도 그 논쟁에서는 내가 진 것 같았다.
그러나 논쟁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정보 분석도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아니다.
“이제 우리 로렐 공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이방인인 그대 눈에는 내 신하들이 보지 못한 게 보이겠죠. 내 신하들이 감히 내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도 그대라면 말할 수 있을 테고.”
“아, 이제 진짜 어려운 시간이네요. 10월 맥주 축제를 준비하는 주민들을 만났는데, 올해도 풍년이라서 축제 규모가 아주 성대할 거라고 합니다. 다들 전하께서 올해도 광장에 오셔서 맥주통 마개를 직접 따실지 궁금해합니다.”
“가야죠. 시민들이 좋아하니까. 그런데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좀 해보세요.”
“사람들이 배가 불렀는지, 슬슬 주세(酒稅)를 개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들을 하더군요. 위스키에 붙는 세금이 너무 높다면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흉년을 대비해야 하니까요.”
“로렐 공국에서 가장 좋은 위스키들은 대공님의 찬장에 있다고도 하더군요.”
“그 위스키를 가져오는 공급책이 대사라는 것까지 시민들이 알던가요?”
“그건 아직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행낭에서 위스키를 두 병 꺼냈다. ‘한 병은 딸까요?’ 하는 표정을 짓자 대공은 테이블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시종이 잔을 가져왔다. 시종 복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인상과 체격으로 봐서 대단한 무예가임이 분명했다. 아마 이 방 주위에 무장한 경비들이 몇 사람은 더 있을 것이었다. 만에 하나 내가 대공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에 대비해서. 대공 본인의 무술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들었다.
내가 위스키에 대해 하는 설명을 대공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썩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 자세로 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했다. 독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먼저 마셨다.
“맥주 축제를 준비하는 여인들이 인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향이 좋은 술이었다. 첫 모금을 맛본 뒤 내가 말했다.
“라인강에서 노래를 부르는 인어 말인가요? 뱃사람들이 그 노래에 현혹되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아닙니다. 새로운 이야기였습니다. 황송하오나 돌아가신 백작님이 등장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내 남편은 병으로 죽었지, 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닌데?”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시장 여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라인강의 인어 하나가 돌아가신 백작님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백작님이 탄 배가 라인강을 항해할 때 난파된 적이 있다고 하는군요. 그때 정신을 잃은 백작님을 그 인어가 강변으로 끌고 가서 살렸고, 그러면서 백작님께 반했다고요.”
“재미있군요. 내 남편이 탄 배가 난파된 적은 없고, 그 동생이 라인강에서 익사하기는 했지요. 30년 전 일이 그렇게 각색되나 보네요. 계속해보세요.”
대공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술을 마셨다.
“백작님께 반한 인어는 사람들의 세계로 오겠다고 결심한 뒤 마녀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마녀는 인어의 꼬리를 없애고 다리를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끔찍한 고통이 따를 것이고, 목소리도 잃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네요. 그리고 백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고 말 거라고 했답니다. 하지만 그런 경고를 받았음에도 사랑에 빠진 인어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인어는 가족을 버리고 뭍으로 나와 말 못하는 소녀가 됐다고 합니다.”
그 순간 대공의 눈 깊은 곳에서 작은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대공은 내 말을 막지는 않았고,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소녀는 기적적으로 백작을 만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작은 얼마 안 있어 이웃 공국의 아름다운 왕녀와 결혼하게 되지요. 다시 한번 무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전하. 이 이웃 공국의 왕녀란 바로 젊은 시절의 전하를 가리킵니다. 백작님과 전하가 식을 올리시는 날 한때 인어였던 말 못하는 소녀는 라인강 변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소녀 앞에 다른 인어들이 나타났지요.”
대공은 천천히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나를 노려보기는 했지만, 내 얘기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인어들은 말 못하는 소녀에게 칼을 건넸습니다. 그 칼로 백작의 심장을 찔러 그 피로 몸을 적시면, 소녀가 인어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죠. 다리가 다시 꼬리로 변하고 목소리도 되찾게 될 거라고요. 인어들이 떠난 뒤 말 못하는 소녀는 칼을 들고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성의 가장 높은 망루에 올라 칼을 버리고 강으로 제 몸을 던졌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찌를 수 없었던 거죠. 그렇게 한때 인어였던 말 못하는 소녀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게 이야기의 끝입니다.”
“그게 끝이군요.”
대공이 내 말을 되풀이했다.
“네, 그렇게 끝납니다.”
대공은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 까닥였다. 가끔 그녀가 그런 포즈로 생각에 잠긴 척하면서 상대를 불안하게 만드는 때가 있는 걸 나는 안다. 누구나 대공이 대단히 명민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머릿속으로 늘 여러 가지 계획을 짜고 있음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대공의 침묵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았고, 그 사실조차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했다.
“이 이야기를 금지시켜야 할까요? 아직 그렇게까지 퍼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물었다.
“금지요? 아니요. 사람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라서, 인위적으로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가 금지하면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나올 테지요.”
대공이 말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는, 금지하면 더 널리 퍼진다.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달이 아름답군요.”
대공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구름 한 점 없네요.”
내가 말했다.
“남편의 시녀들 중에 말 못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제 남편을 오랫동안 사모했던 듯하고요. 저희 결혼식 다음 날 저 망루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이제는 내가 침묵을 지킬 시간이 온 듯했다.
“여염집 소녀들은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하지요. 소녀들의 이야기에서 왕자와 공주는 로맨틱한 사랑을 하고, 마침내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삽니다. 실제 왕자와 공주들의 결혼 생활이 그와는 정반대임을 그대는 잘 알겠지요. 저희들의 결혼은 사업입니다. 어느 가문과 맺어지느냐 하는 것이 공국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아버지들이 아들과 딸의 결혼 상대를 현명하게 정해야 합니다. 로맨틱한 사랑은 각자 애인을 둬서 해결하고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하.”
“제 남편은 고귀한 남자였어요. 저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가정에 책임을 다하려 했습니다. 그 흔한 정부(情婦) 한 명 두지 않았지요. 통치 기간은 짧았습니다만 군주로서도 나쁘지 않았지요. 사람들은 제가 두 공국을 합쳐서 지금의 로렐 공국을 세웠다고 하는데,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평판이 나빴다면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겠지요.”
“시민들은 돌아가신 백작님뿐 아니라 전하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남편은 열병에 걸려 사흘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저는 막 둘째 딸을 낳은 상태였습니다. 혹시 병이 옮을지도 모르니 남편 곁에 가면 안 된다고 의사들이 말하더군요. 남편의 죽음이 확실해졌을 때에야 마지막으로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눈을 감은 상태로 땀을 뻘뻘 흘리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더군요. 망루에서 몸을 던진, 말 못하는 시녀를요. 남편은 그 시녀의 이름을 부르며 죽었습니다.”
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이제 전설이 되겠지요?”
대공이 말했다. 딱히 내 대답이 궁금해서 묻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 속 인어에게는 누군가 공기의 정령 이름을 붙였더군요.”
내가 대답했다. 대공이 이 이야기를 금지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다소 아쉬웠다.
“곧 맥주 축제가 시작됩니다. 맥주는 기쁨을 나누는 술이에요. 왁자지껄 떠들며 꿀꺽꿀꺽 마시는 음료입니다. 로렐의 시민들이 그렇게 즐거워하기를 바라요. 제가 평생 추구한 일입니다. 몸 바칠 가치가 있는 일이지요.”
대공이 창에서 몸을 돌렸다. 달빛을 등지고 서서,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술은··· 맥주와는 다르지요. 기쁨이 아닌 다른 걸 음미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죠.”
대공이 위스키를 천천히 마시며 말했다.
“무엇을 음미하십니까, 전하?”
내가 물었다.
“힘, 영광, 헌신···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이오.”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외로운 성공을 자축하면서. 내가 존경하는 군주를 상처 입히게 되어 씁쓸하고, 내 나라에 이익을 가져올 것이기에 달콤한. 거품이 있는 술은 모략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내 특기가 유언비어 퍼트리기라는 걸 말했던가? 유언비어에는 늘 일정 정도의 사실이 재료로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했던가?
죽은 시녀의 사연을 토대로 삼아 내가 지어낸 인어 아가씨 이야기는 맥주 축제 동안 로렐 공국에 널리 퍼질 터였다. 대공이 금지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힘을 발휘할 이야기다. 사람들이 대공을 냉혹한 권력가로 보게 될 것이고, 로렐 공국의 기원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언젠가는 대공을 마녀로 묘사할 수도 있겠지.
대공과 나는 달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라인강 물속을 헤엄치는 인어들과 말 못하는 시녀, 그 시녀를 사랑한 죽은 백작의 이미지가 잠시 머리에 떠올랐고,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쳤다.
#초단편 #위스키 #보그 #인어공주옆에서
한국 사회, 특히 그 중에서도 불평등 문제를 설명하는 관념들이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자주 생각했다. 한국의 불평등이 언제, 어떤 이유로 심화됐는지, 저소득층이 누구이며 그들의 빈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탄탄한 근거로 통념과 다른 주장을 펼친다. 기존 관념들이 대정부 투쟁에 유용한 논리 구조를 전략적으로 택했다는 지적에 밑줄 여러 번.
두 메리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로 단단하게 이어진다. 어떤 정신에 대한 이야기다. 같은 정신을 지닌 어머니와 딸이 시간을 넘어 손을 잡고 온갖 부조리한 인습과 차별에 맞서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끔은 두 사람이 껴안고 함께 우는 것 같다. 열정적이고도 섬세한 두 영혼이 분투하다 상처 입는 모습을 저자가 생생하게 그릴 때 독자도 울고 싶어진다.
조선일보에 ‘근미래의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STS SF 초단편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4회는 멸종 동물 복원을 소재로 썼어요. 전문 링크는 제일 아래에 달았습니다. ^^
<4회 #멸종 동물 복원>
기술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과학기술과 사회 연구) SF’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써온 장강명 작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보게 될지도 모를 기묘한 풍경을 픽션으로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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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셔스섬에는 도도라는 날지 못하는 새가 살았는데, 17세기 후반에 멸종했다. 한동안 이 새는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고, 인간의 생태계 파괴를 고발하는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21세기 초중반에 도도는 새로운 기술의 대명사이자 상징이 됐다. 멸종되었다가 합성생물학 기술로 부활한 최초의 동물이 된 것이다.
도도를 복원한 건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 대기업 네카팡그룹이었다. 네카팡은 네이처지에 연구 결과가 실리는 날 기자회견을 열고, 회견장에 살아 있는 도도새 네 마리를 가져왔다. 모리셔스 정부에 도도를 기증하고, 도도 서식지 조성과 도도 연구소 건립에 엄청난 돈을 쓸 거라고 했다. 효과 만점의 PR 전략이었다. 이후로 네카팡을 대신해 모리셔스 정부가 멸종 동물 복원을 비판하는 여론에 맞섰다. 네카팡과 모리셔스 양쪽 모두 남는 장사였다. 도도를 보겠다고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모리셔스로 몰려들었고, 네카팡의 주가는 몇 배로 치솟았다. 네카팡은 그런 방식으로 여론의 비판을 피하며 멸종 동물을 부활시켰다. 서식지로 빈곤 지역을 고르고, 동물을 복원해 풀어 놓고, 지역 주민들이 관광을 비롯한 문화 상품 수익을 거두게 했다. 포클랜드늑대, 세이셸앵무, 마르케사스쇠물닭을 그렇게 되살렸다.
네카팡이 본격적으로 관광 수익 배분에 참여한 것은 태즈메이니아데블을 되살렸을 때였다. 관광 수익이 아닌 다른 수익을 올린 건 여행비둘기를 복원했을 때였다. 여행비둘기는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에 무려 50억마리가 살았다. 가슴살이 맛있는 새로 유명했고, 통조림과 알 요리도 인기를 끌었다. 개체 수가 너무나 많았기에 아무도 멸종을 걱정하지 않았는데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20세기 초에 갑자기 사라졌다. 네카팡은 미국 미시시피주와 손잡고 여행비둘기를 복원했다. 네카팡과 미시시피주는 함께 축산 기업을 세웠고, 거기서 생산한 여행비둘기 가슴살과 알을 최고급 식당에 먼저 공급했다.
동물 단체와 환경 단체가 식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전설의 요리를 맛보겠다는 미식가들의 방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동물 단체가 시위를 벌일수록 여행비둘기 요리가 홍보됐다. 얼마 뒤 네카팡과 미시시피주는 ‘미시시피 비둘기 식당’이라는 레스토랑 체인을 열었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셰프들과 손잡고 옛 여행비둘기 요리들을 재현했고, 신메뉴도 발표했다. 레스토랑 체인을 홍보하러 토크쇼에 출연한 네카팡의 이메리 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식당이 생겨야 여행비둘기를 보호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소, 돼지, 닭은 멸종할 염려가 없죠. 축산 농가가 그런 일을 막으니까요. 여행비둘기도 그렇게 인간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여행비둘기 고기는 kg당 탄소 배출량이 소의 20분의 1도 안 됩니다.”
미시시피 주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와 유전적으로 100% 동일한 현재의 여행비둘기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주장이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 멸종시킨 여행비둘기는 멸종된 상태로 두는 게 자연스럽단 겁니까? 우리 주의 주 수입원은 얼마 전까지 카지노였습니다. 도박보다 요식업이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하고,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도 좋습니다.”
네카팡이 코스타리카 정부와 테마파크 건설을 논의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을 때 몇몇 사람은 드디어 ‘쥬라기 공원’이 현실화된다며 환호했다. 정작 네카팡과 코스타리카 정부의 발표는 공룡 복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코스타리카가 정글 유원지를 짓는데, 만약 그 과정에서 지역 고유의 벌새나 나비가 멸종된다면 네카팡이 되살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네카팡은 중국과 동남아, 아프리카 국가의 대규모 토목 사업에 일종의 보험사로 참여했다. 댐 건설로 중국장수도롱뇽이, 리조트 건설로 수마트라오랑우탄이, 발전소 건설로 이집트땅거북이 멸종된다면, 네카팡이 되살리겠다고 했다. 개발 사업에 나선 국가들은 네카팡의 기술력을 추켜세우며 환경 단체의 반대를 묵살했다. 인도자유주의연구소는 벵골대머리수리 서식지를 보호하면서 자기 부상 철도를 건설하지 말고 그 동물을 멸종시켰다가 철도 공사를 마친 뒤 복원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멸종 동물 복원 기술은 편리한 면죄부가 됐다. 여행비둘기가 복원되고 꼭 5년 뒤, 몬태나주의 광활한 농경지를 로키산메뚜기 떼가 덮쳤다. 20세기 초에 멸종된 줄 알았던 곤충이었다. 메뚜기 떼는 점점 수가 불어나 미국 중남부의 농업을 황폐화시킬 기세였다.
뉴스쇼에 나온 이메리 의장은 네카팡이 여행비둘기를 되살릴 때 실수로 로키산메뚜기까지 복원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웃음을 터뜨렸다. “수준 낮은 음모론이죠. 기술적으로 절대 불가능합니다. 로키산메뚜기는 소규모로 어딘가에 살아 있었던 거예요. 실러캔스처럼요. 그와 별개로 지금 환경 재앙인 건 사실이니까, 수를 써야겠죠.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제대로 멸종시켜 버리는 것도 괜찮다 생각합니다. 언제든 되살리고 싶을 때 되살릴 수 있으니까요. 미국 농무부와 논의 중입니다.”
#STSSF #근미래의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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