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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맥주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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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의 풍경 #5 인공지능 집사와 ‘엑셀 이혼’

조선일보에 <근미래의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STS SF 초단편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5회는 인공지능 집사와 ‘엑셀 이혼’ 이야기입니다. 원문 링크는 제일 아래 달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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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과학기술과 사회 연구) SF’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써온 장강명 작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보게 될지도 모를 기묘한 풍경을 픽션으로 전달합니다.

 

근미래의 풍경 5회 #인공지능 집사와 ‘엑셀 이혼’

 

‘반반 결혼’, ‘엑셀 이혼’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2020년대 중반이었다. 부부 어느 한쪽이 자기 혼자 쓰려고 산 물건 값은 그 사람이 내자, 집안일도 누가 얼마나 더 많이 했는지 정확히 기록하자는 인식이 젊은 부부들 사이에 그즈음 퍼졌다. 소비, 가사, 육아까지 서로 부담한 부분을 엑셀에 기입하고 이혼할 때 그 자료를 근거 삼아 재산분할을 했다. 이 새로운 풍습은 처음에는 싸늘한 비판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 상식이 되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한국의 대기업 네카팡은 재빠르게 자신들의 홈오토메이션 시스템인 ‘김집사’에 관련 기능을 도입했다. 그 가정의 구매 내역을 분석해 남편과 아내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쓰는 물건인지 계량해서 수치화하는 기능이었다. 면도용 크림이나 생리대 같은 제품을 다른 부부는 공동 계좌에 있는 돈으로 샀는지 아니면 실제 쓰는 사람의 사비로 처리했는지 살필 수도 있었다. 이 기능 덕분에 김집사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금세 ‘표준’이 만들어졌다. 그걸 집단지성 또는 사회적 합의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김집사는 오래지 않아 지능형 자동차 운영시스템과도 연결되었다. 명절 때 시댁에 가느라 쓴 휘발유 가격과 차량 감가상각비는 남편이, 처가에 가느라 든 비용은 아내 몫으로 분리할 수 있었다. 서로 얼굴 붉히며 펜을 들고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필요가 없었다. 지능형 자동차에는 운전자가 누구인지 감지하는 센서가 있었으므로, 여행을 갈 때에는 운전을 맡은 사람의 노동 비용을 김집사가 자동으로 계산했다.

 

가전제품들이 사물인터넷과 연결되면서 자동차뿐 아니라 청소기, 싱크대, 주방, 화장실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김집사가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청소와 설거지, 요리를 누가 하는지, 얼마나 오랜 시간 그 일을 어떤 성의로 하는지도 김집사가 평가할 수 있게 됐다. 김집사는 집안일과 육아에 남편과 아내가 각각 얼마나 기여하는지도 계산할 수 있었다.

 

김집사는 한 달에 한번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잘못 작성된 항목을 이용자가 지적하면 그걸 학습해서 이후의 정산에 반영했다. 네카팡에서는 김집사의 리포트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 부부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는 내용으로 보도자료도 만들고 광고도 내보냈다. 네카팡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연구도 후원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의 연구에서는 김집사의 정산 기능을 사용하는 부부가 결혼생활 만족도가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연구결과와 이용자의 피드백을 모아 네카팡은 김집사에 부부관계 조언 기능을 도입했다.

 

정작 김집사는 서로 싸우는 부부에게 더 유용한 도구인 듯했다. 그즈음부터 인터넷 게시판들에 김집사 보고서를 캡처한 이미지들이 올라왔다. ‘전업주부의 가사 기여도가 58%밖에 안 되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이렇게 육아를 안 하는 남자, 정상인가요?’ 같은 고발과 함께. 결혼 전에 가사 기여도를 숫자로 정해놓는 커플도 늘어났다.

 

급기야는 김집사가 서울시장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당 후보의 딸이 ‘아버지가 밖에서는 페미니스트인 척 하지만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어머니를 부린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부모 집의 김집사 리포트를 공개했는데 그 후보의 가사 기여도는 충격적이게도 2.1%였다. 사람들은 ‘재활용 쓰레기만 잘 버려도 저 정도는 나온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를 계기로 소셜미디어에 자기 집의 김집사 리포트를 올리는 정치인들이 생겨났다. 얼마 뒤 김집사 리포트 공개는 오피니언 리더 그룹에서 유행이 되었다. 네카팡은 김집사 리포트를 소셜미디어에 쉽게 올릴 수 있는 기능을 얼른 도입했다. 김집사 리포트를 시댁이나 처가에 매달 자동으로 보내는 기능도 함께. 김집사 리포트 공개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무섭다며 투덜대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그들은 그렇게 불평할 때 ‘가사 분담이 싫다는 게 절대 아니다’라는 변명을 덧붙여야 했다.

 

김집사는 시장에 나온 지 10년도 안 돼 수많은 가정의 풍경을 바꿨다. “세탁기 이후로 주부의 삶을 가장 크게 바꾼 발명품”이라는 찬사를 하는 이도 있었다. ‘기계한테 24시간 감시 받으며 사는 것 같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할 때 김집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달 말까지 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셔야겠어요”고 조언하기도 했다.

 

네카팡 이메리 의장은 한 사회 포럼에서 ‘김집사가 바꾼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며 업무평가시스템 ‘김팀장’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데, 회사는 ‘월급 루팡’이 생길 걸 걱정하죠. 김팀장은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겁니다. 직원이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을 정확히 파악해줄 테니까요. 인사고과나 연봉협상에도 당연히 활용될 수 있고요. 김집사에 이어 김팀장이 세상을 한번 더 바꿀 겁니다.”

 

#근미래의풍경 #STS #STS_SF #반반결혼 #엑셀이혼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11/04/VRRVWESAIJFO5HZDMNPBIKCQTM/

59. 뉴욕타임스 과학 (나탈리 앤지어, 월데머 캠퍼트, 월터 설리번, 존 노블 윌포드, 칼 짐머)

어린 시절 내게 과학자들의 발견과 공학자들의 발명 이야기는 그저 감탄과 찬미의 대상이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과학의 성취가 사회에 늘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 모르겠다. 과학자들 역시 인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성자가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한 욕망을 지닌 개인들로 바라보게 됐다.

요즘은 무력감도 종종 느낀다. 과학기술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커지는데 나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서도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급력에 대해서는 과학자들 스스로도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듯하다. 다 같이 혼돈 속으로, 점점 더 빨리 달려가는 기분.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접한 『뉴욕타임스 과학』(열린과학)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904쪽짜리 이 양장본 도서는 제목 그대로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과학 기사 125편을 엮었다. 기사의 최초 게재일은 19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당시 서평도 있고 구글의 자율주행 자동차 시승 르포도 있다.

일단 재미있다. 뉴욕타임스 과학 담당 기자들은 자신들이 뭔가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목격자임을 알았다. 투탕카멘왕의 무덤 발견, 달 착륙, 가정용 텔레비전의 보급 가능성, 월드와이드웹 개발을 보도하는 기사에는 당시의 흥분과 전율이 생생히 담겼다.

헛다리도 꽤나 짚긴 했다. 1919년 일반상대성이론이 증명됐을 때 그 함의를 설명하는 기사는 논조가 상당히 한가하다. 보통 사람과는 관련 없는 문제라는 투다. 다음해에는 우주에서 로켓 추진은 불가능하다는 사설을 냈다. 하지만 트랜지스터 발명을 두고는 거대 산업의 토대가 될 거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에이즈 확산과 기후 변화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보도에서는 과연 뉴욕타임스,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러 쪽에 걸친 필진 약력이 인상적이다. 퓰리처상 수상자가 수두룩하고, 현역 과학자, 의사, 대학 교수, 박물관장, 탐험가, 소설가도 있다. 한국 언론은 과학 기사와 논평에 얼마나 공을 기울이는지 궁금해진다. 지금 가장 중대한 이슈인데.


뉴욕타임스 과학 - 질문, 발견, 탐구에 관한 150년간의 이야기
뉴욕타임스 과학 - 질문, 발견, 탐구에 관한 150년간의 이야기
58. 사회심리학 (로버트 치알디니, 더글라스 켄릭, 스티븐 뉴버그)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루는 논픽션을 쓰고 싶다. 지금은 막연하게 참고가 될 듯한 글들을 훑어보면서 이런저런 구상만 하는 단계다. 빅테크 기업의 힘이나 디지털 세대의 문화를 다루는 서적을 많이 읽었는데, 정작 지금까지 가장 큰 도움이 된 책은 두툼한 심리학 전공서였다.

로버트 치알디니, 더글라스 켄릭, 스티븐 뉴버그, 이렇게 연구 경력을 합하면 130년이 된다는 심리학자 세 사람이 함께 쓴 『사회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이다. 대학 교재로 쓸 828쪽 짜리 책을 앞에 두고 솔직히 주저하기는 했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펼치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매우 재미있게 잘 쓴 교양서이기도 했던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저자들의 필력이 좋고, 힐러리 클린턴이나 프리다 칼로 같은 잘 알려진 인물, 엔론 사태 같은 유명 사건을 사례로 적극 활용해서다.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이 흥미진진한 보다 깊은 이유는, 사회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지상최대의 이야기’라는 서문 제목이 허풍이 아니다. 이보다 더 스케일이 큰 인간 드라마가 또 있을까. 읽다 보니 인터넷의 기묘한 힘과 소셜미디어 속 괴이한 사건의 배경도 사회심리학으로 풀 수 있었다.

책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사람, 상황, 그리고 사람과 상황의 상호작용이라는 세 요소로 나눠 분석한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오프라인과 다른 별난 상황이며, 사람들은 그 별난 상황과 별나게 상호작용한다. 특이한 사람은 그런 공간에서 더 특이하게 군다. 인터넷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꽤 많은 수수께끼의 답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신동해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장은 “새로운 분야의 가장 믿을 만한 콘텐츠는 교과서인데, 한국에서 교과서는 교재의 형태로만 유통된다”며 “그 장벽을 편집과 디자인으로 넘어보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 출판사에서 펴낸 데이비드 버스의 『진화심리학』, 리처드 탈러의 『행동경제학』도 같은 기획 시리즈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사회심리학 - 마음과 행동을 결정하는 사회적 상황의 힘
사회심리학 - 마음과 행동을 결정하는 사회적 상황의 힘
57. 통제 불능 (케빈 켈리)

기계는 인간을 지배하게 될까? 21세기가 아니라면 22세기에라도? 인간은 계속 기계를 다스릴 수 있을까? 레이 커즈와일 같은 미래학자는 인간보다 똑똑한 기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기계와 결합해 ‘포스트휴먼’이 되고, 호모사피엔스를 능가하는 다른 종으로 도약하면 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낙천적인가.

과학기술 잡지 《와이어드》의 초대 편집장이었고, 이제는 ‘과학 사상가’라는 수식어도 어색하지 않은 케빈 켈리는 보다 난감한 전망을 제시한다. 인간과 기계는 결합하기는 결합한다. 개체 수준을 넘어, 거대한 생태계 차원에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태어난 것’과 ‘만들어진 것’은 곧 하나의 복잡적응계로 수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야생’이 출현한다.

몇 줄로 거칠게 요약을 해놓으니 뜬구름 잡는 소리 같지만 『통제 불능』(김영사)이 931쪽에 걸쳐 펼치는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책이 근거로 제시하는 논리들은 거대하면서 참신한데,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게끔 만든다. 그것도 여러 번.

저자가 사용하는 방식은 주로 먼 거리에서 크게 조망하기다. 예를 들어 책은 생태계를 이렇게 규정한다. ‘각각의 종들이 서로 제각기 다른 역할을 시험해보고 새로운 파트너 관계를 모색하는 느슨한 네트워크.’ 그런 시스템에서는 한 사건이 생각지도 못한 지점까지 거의 무한히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우리는 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이제 생명만큼이나 복잡해진 영리한 기계들과 인류는 바로 그런 관계가 될 것이다.

썩 쉽지는 않다. 하지만 천천히 곱씹어 읽는다면 진화, 생물학, 자아, 섹스, 인류의 역사까지 낯선 언어로 재검토하면서 뜻밖의 통찰들을 무더기로 건질 수 있다. 왜 지구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가, 왜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가, 그 자체로 살아 있으며 그렇기에 늘 불확실한 네트워크 세상―인간 사회든 경제 시스템이든―에서는 어떤 목표를 지녀야 하는가 같은. 물론 우리 앞에 닥친 미래와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통제 불능 - 인간과 기계의 미래 생태계
통제 불능 - 인간과 기계의 미래 생태계
56. 도도의 노래 (데이비드 쾀멘)

도도는 인간에게 제법 친숙한 새다. 이름이 재미있고, 생김새가 우스꽝스럽고, 사람을 좋아하는 습성에도 호감이 간다. 대중문화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는 도도를 본 적이 없고, 이 글의 독자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 남동부 모리셔스에 살던 이 새는 17세기에 멸종했다. 제대로 된 박제도 남아 있지 않다.

데이비드 쾀멘의 『도도의 노래』(김영사)는 도도의 멸종 과정과 원인을 자세히 다루지만, 그 이야기만 하지는 않는다. 다윈과 함께 진화론을 창시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행적을 쫓고,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비극적 역사를 서술한다. 화산 폭발로 거의 모든 생물이 죽은 아낙크라카타우 섬을 탐험하고, 카누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극락조를 찾아간다.

이렇게만 소개하면 여러 소재를 뒤죽박죽 산만하게 다루는 책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884쪽짜리 논픽션에 나오는 다양한 현장과 인물들, 동식물들, 그리고 과학이론은 생태학의 한 갈래인 ‘섬 생물지리학’으로 초점이 모아지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매끄러워서 신기하다는 기분마저 들 정도다. 저자의 문장도 매우 유려하거니와, 메시지를 쌓아올리는 책의 기본 설계 자체가 무척 정교하고 치밀하다.

생물과 지리의 관계에서 섬이라는 장소는 왜 중요할까. 책의 한 문장을 옮긴다. ‘섬은 종들이 멸종해가는 곳이다.’(356쪽) 같은 면적이라도 대륙보다 섬에서 종들은 쉽게 사라진다. 고립된 생태계는 충격에 취약하다. 이런 깨달음은 과연 섬처럼 격리된 작은 자연보호구역이 생물 다양성 보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딱딱하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데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생태계의 복잡성과 섬세함을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진 과제의 무게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파괴하기는 이토록 쉬운데 제대로 지키기는 어쩌면 그리 어려운가. 그럼에도 저자의 어조는 공격적이거나 절망스럽지 않고, 글은 품위와 유머를 잃지 않는다. 슬프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지적이고, 모험소설 같은 현장감과 흥분을 전하는 기묘한 매력의 책이다.

 


도도의 노래 - 사라진 새 도도가 들려주는 진화와 멸종 이야기
도도의 노래 - 사라진 새 도도가 들려주는 진화와 멸종 이야기
54, 55. 부모와 다른 아이들 1, 2

지난해 완독한 책이 120권인데, 그 중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두 권을 아주 자신 있게 꼽을 수 있다. 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열린책들) 1, 2권이다. 지적인 충격도 받았고, 덕분에 세상과 인간을 보는 시각도 조금 바뀌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저작이기는 하다. 1권이 872쪽, 2권이 760쪽이나 된다. 게다가 가슴이 미어지는 일화가 쉬지 않고 이어져, 무척 쉽게 잘 쓴 원고임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붙지는 않는다. 종종 눈을 감거나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추고 한숨을 쉬어야 한다. 그런 고통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깊이 파헤친다는 게 이 책의 핵심이고 장점이다.

제목대로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다루는 내용이다. 1권에서는 부모와 달리 청각장애, 왜소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조현병을 겪는 아이들, 그리고 그런 자식을 키워야 하는 부모들의 삶과 싸움을 보여준다. 2권은 좀 더 나아간다. 어린 천재, 범죄자, 트랜스젠더, 성폭행으로 태어난 아이들과 그 부모들의 이야기다.

일단 어마어마한 취재에서 나오는 묘사의 생생함과 주장의 설득력이 독자를 압도한다. 저자는 300가구를 인터뷰했고 취재 기록은 4만 쪽이 넘는다고 한다. 자폐인 부모의 절망감이나 조현병 환자 가족의 두려움에 대해 읽을 때는 심장이 죄어드는 기분이 든다. 막연히 힘들겠지, 하고 짐작하는 수준의 짐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는, 뭘 해야 할까.

인간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이 책을 통해 ‘수평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답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유전으로 물려받지는 않고, 오히려 멀리 떨어진 타인과 공유하는 특징들. 청각장애나 작은 키가 어떤 이들의 정체성이 된다면, 그것을 ‘치료’하겠다는 시도는 어떻게 봐야 할까.

쉽게 답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질문들을 담았기에, 앞으로도 몇 번 더 훑어보게 될 것 같다. 이 칼럼 독자들께도 당연히 추천한다. 각 장이 비교적 독립적인 구성이라, 뜻 맞는 지인들과 독서 스터디를 통해 읽어도 괜찮겠다.


[세트] 부모와 다른 아이들 - 전2권
[세트] 부모와 다른 아이들 - 전2권
53. 인간 무리, 왜 무리지어 사는가 (마크 모펫)

사람을 가장 닮은 동물은 뭘까? 침팬지? 보노보? 어쩌면 답은 ‘개미’인지도 모른다. 개체 차원에서는 물론 인간과 유인원이 비슷하다. 그러나 사회 수준에서는 유인원 집단보다는 개미 군집이 훨씬 더 우리의 도시와 흡사하다.

침팬지는 모르는 침팬지와 협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침팬지 집단의 규모는 일정 크기를 넘지 못하며, 그 안에서 ‘익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펭귄이나 아메리카들소는 거대한 군집을 이루기는 하지만 그저 모여 있을 뿐이다.

반면 인간과 개미는 잘 모르는 상대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협력한다. 사실 인간은 다른 집단의 구성원과 어울릴 수 있다는 점에서 개미와도 다르다. 처음에는 분명히 인간 무리도 작은 수렵채집인 집단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크고 정교한 사회를 이루게 됐을까. 어떻게, 그리고, 왜?

열대생물학자 마크 모펫의 740쪽 짜리 책 『인간 무리, 왜 무리지어 사는가』(김영사)를 읽다 보면 이처럼 인간의 사회성이 얼마나 기이하고 독특한지 새삼 깨닫는다. ‘어떻게, 그리고, 왜’에 대한 탐구는 겸손처럼 우리가 개인의 미덕으로 여기는 특질이나 평등주의 같은 개념에 대한 색다른 통찰로 이어진다.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통섭의 적절한 사례다.

책은 뒷부분에서 묵직한 숙제를 던진다. 우리를 묶어준다고만 여겼던 인간적 사회성에는 치명적인 취약점이 있다. 깊은 생물학적 본성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지위를 위해 엄청나게 잔인해질 수 있고, 적을 발명해 인간이 아닌 존재로 기꺼이 깎아내린다. 인간 사회는 반드시 분열된다.

세계화와 파편화가 동시에 진행 중인 이 시대에 더 무겁게 다가오는 화두다. 그렇다면 그런 압력에 맞서 현재의 사회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저자는 ‘순진한 범세계주의는 몽상’이라고 단언한다.

지난해 나온 서적 중에서 가장 표지가 예쁜 책이 아닐까 싶은데, 영어판 원서와는 디자인이 딴판이다. 임솜이 김영사 편집자는 “다양한 생물종의 사회를 다루는 책이라 다채로운 느낌이 들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앙리 루소의 정글 그림이 떠올라 디자이너에게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인간 무리, 왜 무리지어 사는가
인간 무리, 왜 무리지어 사는가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2> 3회가 올라왔습니다. ^^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2> 3회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단행본이라는 뉴미디어’라는 제목으로, 얼룩소 파산과 퍼블리 매각을 보며 생각한 점을 써봤네요.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해서도 조금 써봤습니다. ^^


#소설가라는이상한직업2 #단행본이라는뉴미디어 #미디어리터러시 #퍼블리 #얼룩소 #롱블랙


https://tobe.aladin.co.kr/n/274857


52.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이달 5일로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됐다. 그의 공식 전기를 집필한 월터 아이작슨은 ‘10년이 지나고 나니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며 후기를 썼다. 국내 출판사인 민음사에서 그 글을 포함한 960쪽 짜리 『스티브 잡스』 특별증보판을 냈는데, 저작권사의 허가를 받아 한정 수량만 제작했다고 한다.

이 특별증보판은 최신 아이폰의 세 가지 인기 색상을 적용한 보관용 케이스에 담겨 온다. 보고 있자니 ‘참 예쁘게 잘 만들었다’는 감탄과 함께, 묘한 생각이 든다. 정작 이 전기는 잡스가 만든 물건들과 매우 다르다는 거다. 두께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애플 제품에는 모두 최대한 얇아지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이 전기의 저술 과정에는 어떤 혁신도 없다. 반대로 놀랍도록 정석 그 자체다. 잡스를 포함해 수많은 업계 거물들을 충실히 인터뷰하고 내용을 정리했다. 잡스는 제품을 과감히 규정하고 많은 것을 대담하게 버렸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선택과 집중, 그리고 센세이션이라는 면에서 대니 보일의 영화 《스티브 잡스》야말로 애플 제품을 닮았다).

그렇게 애플 제품과 다른 점들이 바로 이 전기의 뛰어난 점이다. 잡스는 누구인가? 저자의 평가는 퍽 조심스럽다. 이후에 쓴 ‘레오나르도 다빈치’(아르테) 같은 책과 비교하면 그 신중함이 더 두드러진다. 아주 매력적인 모순덩어리죠? 여러분은 어떻게 소화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것 같다.

내가 이해하는 잡스는 본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다. 아이폰이 소아마비 백신이나 3점식 안전벨트에 견줄 수 있는 발명 같지도 않다. 하지만 잡스의 일대기는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시스템이 촘촘해지고 개인은 왜소해지는 시대에, 그는 우리가 꾸는 꿈이다. 홀로 운명에 맞서 기어이 자기 뜻대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웃기는 이야기는 덤덤하게, 무거운 이야기는 가볍게. 내가 믿는 스토리텔링의 철칙이다. 독자를 흥분시키는 이야기는 차분하게 써야 한다. 바로 그렇게 잘 쓴 책이고, 나는 애플 제품보다 이 전기에 더 흥분한다.

 


스티브 잡스 (보급판)
스티브 잡스 (보급판)
51. 조지프 앤턴 (살만 루슈디)

34세에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가 된 젊은 소설가가 있다. 인도 출신인 그는 어린 나이에 혼자 영국으로 유학을 왔고, 가족은 얼마 뒤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가족이 이민한 이유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그는 소설을 통해 스스로를 설명하고 싶었다. 그 야심작을 쓰는데 5년이 걸렸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자란 그는 이 소설에서 이슬람에 대한 고찰과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뒀다고 여겼지만 책이 나오자 무슬림들은 격분했다.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다들 ‘이슬람을 모욕한 책’이라는 말만 믿고 저자를 저주했다. 마침내 종교 지도자가 신도들에게 저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살만 루슈디, 그리고 20세기 최대 필화 사건으로 꼽히는 『악마의 시』 이야기다. 루슈디는 이름을 바꾸고 영국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13년 동안 숨어 살았다. 그때 썼던 가명은 824쪽짜리 자서전의 제목이 되었다. 『조지프 앤턴』(문학동네).

화끈하고 감동적인 책이다. 기본적으로 스릴러이며, 오만하고 겁 많고 세속적인 글쟁이가 투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인간 드라마이기도 하다. 3인칭으로 서술되는 루슈디가 고결한 순교자 타입이 아니라서 더 재미있다.

그는 혼란에 빠지고, 자책하고, 자식을 만나지 못해 괴로워한다. 이슬람 지도자들과 화해를 시도하다 지지자를 잃고, 인신공격에 분을 삭이지 못한다. 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하면서 자신이 여전히 작가인지 회의에 빠진다. 이혼하고 재혼하고 바람을 피운다.

‘악마의 시’ 논쟁에서 루슈디의 반대편에 섰던 이들 중에는 쟁쟁한 서구 지식인들도 있었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문화와 타인의 감정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던지는 지점이다.

책을 펴낸 문학동네 출판사는 루슈디의 저작을 꾸준히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루슈디뿐 아니라 번역가와 출판사에 대한 위협도 많았는데, 그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요?” 그렇게 묻자 담당 편집자는 “걱정은 모르겠고, 꼭 나와야 하는 책들이었다”고 대답했다.

 


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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