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방범 탐정 에노모토’ 시리즈의 중단편집. 주인공 에노모토 케이는 방범 컨설턴트 겸 도둑이고 그가 등장하는 작품들은 모두 밀실 트릭을 소재로 한다. 이번에는 문이 단단히 잠긴 조폭 사무실, 출입 통로가 CCTV로 촬영 중인 미술관, 외딴 산장 추리소설가의 작업실 등이 배경. 마지막 단편의 밀실이 독특한데,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보트다.
페니실린이 발견된 게 1928년이다. 메리 멜런은 1869년에 태어났다. 장티푸스균을 지니고 있었지만 본인은 병에 걸리지 않는 무증상 보균자였다. 실명이 공개되고 ‘장티푸스 메리’라는 악명이 붙은 그녀는 신분을 숨기고 도망 다니며 요리사로 일했고, 주변에서는 계속해서 장티푸스 사망자들이 나왔다. 끝내 보건당국에 붙잡힌 그녀는 26년 동안 격리병동에서 살아야 했다. 메리를 위해 슬퍼하고 그녀가 당한 부당함에 분노하거나 명예욕에 눈이 먼 의사나 잔인한 언론, 군중심리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공안과 개인의 인권이 충돌할 때 어떻게 선을 그을지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저자는 서울대에서 한국철학을 공부한 한국학 교수다. 주자학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데 몇몇 부분이 굉장히 날카롭다. 한국 사회는 ‘도덕지향적’ 사회다. 모든 문제를 도덕의 문제로 환원해서 평가하며, 그래서 대의명분이 매우 중요하며, 순수성을 얻기 위한 투쟁이 반복된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도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적 욕망을 도덕적인 것으로 포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가 ‘장애인의 인간승리’로 소개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 박현묵의 서사에도 전형적인 요소는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뜻밖의 기이한 에너지와 낯선 유쾌함도 있다. ‘찐덕후 감성’도 그 중 하나다. 나는 박현묵은 아라고른이고, 김준범 교수는 간달프, 박현묵의 어머니는 갈라드리엘, 책을 쓴 강인식 기자는 레골라스나 김리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톨킨이 창조한 캐릭터건, 여러 문화권에서 오랜 과거부터 내려온 전승 속 인물이건 간에, 우리가 영웅이라 부르는 존재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자신만의 가혹한 시련을 겪고, 조력자를 만나 성장하며, 소명을 깨닫고 도전해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낸다. 그 과정은 언제나 설레고 감동적인데, 아마 우리가 그런 삶을 소망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폭력’이라고 불러야 하는 범죄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우리가 모두 알지만, 어떻게 분류하고 명명해야 할지 몰랐던 폭력 범죄. 훈육, 엄부(嚴父) 같은 단어 뒤에 숨었던. 이 기록과 고백은 투쟁 서사이며, 성장 서사이며, 영웅 서사인 동시에 구원 서사다. 저자는 희생자와 생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거기에 맞선다. 다른 희생자를 설득하고 돕는다. 김가을 작가는 마침내 적을 쓰러뜨린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적을 이해하고 구하려 나선다. 그 과정에서 이 투사이자 구원자에게 독서가 무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특히 무겁게 다가왔다.
주요 선진국에서 평균 지능지수가 점점 상승하는 현상을 ‘플린 이펙트’라고 부르며, 이 책의 저자가 발견자다. 우리 뇌가 조상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달라졌다기보다는 현대인들이 받은 교육이나 그들이 처한 환경이 추상적 문제 해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그렇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며 저자의 의견도 다르지 않다. 읽을거리로서는 다소 딱딱한 편.
도서관 관장이 쓴 분서의 역사. 어떤 의미에서는 책을 불태우는 인간들이야말로 책의 힘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들이다. 마무리에서는 현대의 디지털 환경을 비판한다. 인터넷을 도서관이라고 치면 마치 이곳저곳에서 불이 타오르는 상황과 같다는 것. 디지털 기록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다.
산문집 『미세 좌절의 시대』를 냈습니다. 몇 년간 신문들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은 책입니다. 작가의 말을 제일 앞에 썼는데 책 홍보 삼아 이 자리에 올립니다.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 원칙들에 대해 적어봤어요. 서점 링크는 아래 달았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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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화에 대하여
2016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 그리고 몇몇 잡지에 칼럼을 백삼십 편 가량 썼습니다. 그 중 구십여 편을 추려 책으로 묶습니다.
칼럼들을 쓸 때 언젠가 책으로 엮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큰 주제를 염두에 두고 명확한 계획 하에 글을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청탁받은 원고 분량은 대개 한 편에 200자 원고지 10매 안팎이었는데, 마감일이 닥쳐오면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자로 풀었습니다.
경제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떨친 미국 언론인 주드 와니스키가 젊은 시절 《월스트리트저널》에 스카우트될 때의 일입니다. 논설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며 주저하는 와니스키에게 《월스트리트저널》 편집장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주드, 오만함만 있으면 된다네.”
저는 칼럼도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200자 원고지 10매는 복잡한 사유를 풀거나 논증을 치밀하게 펼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말하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풍성하게 들기조차 어렵습니다. 거친 일반화를 하면서 의견을 제시해야 하고(인간에 대해서든 사회에 대해서든, 분석과 진단은 모두 일반화 과정을 거쳐 나옵니다), 정밀한 근거를 충분히 들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저는 남들이 다 옳다고 인정하는 주장을 보충하기보다는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거나 토론 거리를 제안하고픈 욕심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칼럼 작업에 그 이상의 대단한 야심은 없어서, 마감일 즈음에 떠오른 단상을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원고를 썼습니다. 관심사가 그리 넓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여 느슨한 일관성이 저절로 생긴 것 같기도 합니다. 한 줄로 정리해보라고 한다면(또 일반화를 하자면) ‘매사에 회의적인 사람이 점점 불확실해지는 시대 앞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막연한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016년에서 2024년 사이에 저는 세상이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고, 새로운 미디어 기술과 선정적인 구호들(구호와 일반화는 다릅니다)을 퇴행의 배후로 의심합니다. 새로운 기술과 구호들은 서로 대단히 잘 결합하는 듯 보였고 저는 그 단단한 결합을 보며 무력감을 삼키거나 우울해지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제가 의심하지 않는 몇 가지 삶의 원칙들이 있는데, 막 용기를 주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어서 소박한 궁리의 기반은 되어줍니다. 제 원칙들은 개인은 존엄하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실은 믿음보다 중요하다 등입니다.
칼럼을 쓰는 일이 저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를 얻어 좋았지만 저의 본업이 아니라는 고민도 했습니다. 고민이 커져 칼럼 연재를 모두 그만두었는데, 아쉬움도 밀려오더라고요. 아주 나중에, 여유가 생기고 적당한 지면을 얻으면 또 짧은 산문들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다 예측 가능한 세상에서 희망찬 이야기를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늘 지켜주는 아내와, 원고를 다듬어주시고 조언해주신 문학동네 정민교, 정은진 편집자님께 감사드립니다.
2024년 봄,
장강명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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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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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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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의 단편 63편을 담았다. 대부분은 현대 기준으로는 단편이라기보다는 엽편 쪽에 가깝다. 808쪽짜리 책에 63편이니까 편당 평균 길이는 12쪽 남짓이다. 책 자체는 두껍지만 콩트집 읽듯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비곗덩어리」와 「목걸이」가 유명하지만 내게는 「피에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에 대해서는 다들 쉽게 말하지만, 재미라는 게 도대체 뭐냐고 물어보면 말문이 막힌다. 재미는 이론화하기도 어렵고 이론화하려는 시도도 적었다. 재미는 행복의 한 요소인 것 같지만 행복 그 자체는 아니다. 재미와 즐거움을 구분하는 연구자도 있다. 재미는 맥락적이며, 타인과의 관계 혹은 권력과 연관이 있고, 전복적인 측면이 있다. 재미있을 때 우리는 현재에 충실하며, 여러 가지 엄숙한 질문에서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