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초등학교가 배경인 추리소설 단편집. 여섯 편은 비정규직 교사가 주인공이고 두 편은 장난꾸러기 소년이 주인공이다. 다 고루 재미있다. “학교 선생님이 주인공인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읽었다”고 하니 아내가 “학교 선생님이 주인공인 소설을 게이고는 50편은 썼을 걸”이라고 받아친다. 설마 50편이나 쓰지는 않았겠지.
추리물로도 훌륭하고, 호텔리어의 생활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 성실하고 고집 센 주인공들은 사랑스럽다. 범인의 동기가 섬찟하고, 있을 법하다. 그리고 게이고가 매스커레이드 시리즈를 쓰는 속도는 내가 그 시리즈를 읽는 속도보다 빠르다.
작가가 데뷔 10년차에 낸 단편집. 이보다 몇 년 전에 낸 단편집인 『범인 없는 살인의 밤』보다는 한끗 모자란 듯도 싶지만, 그래도 작품들의 수준이 다 어느 선 이상이다. 「등대에서」가 정말 찜찜하고 여운이 길었다. 매우 좋았다는 얘기.
게이고의 초기 소설집. 별 생각 없이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는데 갓 만든 음식이 무지 맛있고 손님이 없어 분위기도 좋고 각종 할인을 받았더니 가격도 싸서 횡재한 듯한 그런 느낌으로 읽었다. 게이고 본인은 ‘신인의 책인 걸 감안한다면 칭찬해주고 싶다’고 자평했는데, 오만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 짐승 같은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그들이 서로 물어뜯게 만들었다.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별로 없지만 희한하게 재미있다. 프롤로그와 본문이 이어지는 것 같지 않아서 뭔가 하고 중간에 여러 번 앞을 들춰봤는데 그게 다 뒤에서는 맞아떨어지더라.
이 소설집을 읽을 때부터 ‘히가시노 게이고는 천재다!’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아이디어로 재치 있게 쓸 수 있다니, 히가시노 게이고는 정말 천재다. 출판업에 한 발 걸친 사람이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다. 「고령화 사회 살인사건」이나 「독서 기계 살인사건」 같은 작품은 신랄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장편소설 살인사건」을 보니 일본은 한국과 달리 긴 소설이 유행하나 보네.
이 책 구절들을 몇몇 지인들에게 보냈다. ‘난 다 잘 될 거니까 대충 살아야지’라는 말은 긍정의 말이 아니다. 긍정의 자세로 살려면 철학과 강인함이 필요하다. 세상의 그림자들을 왜 피할 수 없는지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런 얘기를 하는 책이다. 작가가 너무 솔직하게 자기가 겪은 그림자들을 털어놓아서 가슴이 저릿했다. 책 다 읽고 유유출판사에 말들 시리즈는 어떤 형식으로 써야 하느냐고 문의함. 이게 긍정의 힘이다!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인터뷰어와 티벳불교 스님 인터뷰이의 문답집. 스님이 젊을 때 대출 받아서 스포츠카까지 포함해서 차 두 대 몰고 다니셨다는 이야기에 뭐 이래, 하고 툴툴거렸는데 고생도 많이 하셨더라. 답이라고 꼭 답인 것만은 아니고 질문이라고 꼭 질문인 것만은 아니다. SNS는 불행의 지름길이라는 건 이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이야기가 된 것 같다.
네이버웹툰이 내 소설들의 2차 저작권을 관리해준다. 네이버웹툰에서 나를 맡았던 담당자가 출산 휴가를 떠나게 된다고 하여 새 담당자와 함께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 웹툰과 웹소설 업계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들었다. 시장이 몇 년 전과는 또 다르게 엄청난 규모로 커지는 중인 것 같았다.
요즘 네이버와 카카오는 웹소설 플랫폼 인수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문피아는 예상 인수 금액이 3000억 원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네이버가 문피아를 정말로 그 가격에 사들이게 되면 문피아 대표는 천억 대 자산가가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물었더니 네이버웹툰 팀장은 그럴 거 같다고 대답했다.
문피아 대표는 무협 소설가 금강(金剛)인데, 이 매각이 성사되면 한국에서 문학으로 가장 큰 돈을 번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싶다. 한국의 웹툰이 일본에서 종이 만화를 몰아내고 있다는 이야기, 카카오의 일본 자회사인 카카오재팬의 기업 가치가 웹툰 덕분에 8조 원으로 인정받았다는 얘기도 신기했다. 현기증 나는 세상이다.
웹 예능과 동영상 콘텐츠 플랫폼에 대해 팀장이 들려준 분석도 흥미로웠다. 지상파 TV에서 케이블 TV로, 거기서 다시 스트리밍 서비스로, 그리고 웹 예능물로 주도권이 옮겨가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후자로 갈수록 제약이 없어서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다는 것. 장안의 화제인 웹 예능 《머니게임》 제작에 그 팀장이 간여했다.
이날 HJ는 어느 외국계 회사와 화상 면접을 치렀다. 그 시간에 나는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부모님 댁에 갔다. 가보니 어머니가 저녁밥을 짓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일상에 넌더리를 내고 계셨다. 그래서 근처의 베트남 음식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나갔고, 밖에 계시던 아버지도 그리로 불렀다. 거기서 월남쌈과 튀김 샘플러를 먹었다.
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다 읽었다. 1권에서는 청각 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중증 장애를 겪는 환자 가족을 다뤘는데, 읽기가 정말 괴로웠다. 책이 나쁘거나 지루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인터뷰한 가족들의 고통이 정말 생생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자폐증이나 정신분열증 환자 부모의 삶은 지옥 같았다. 자식을 살해하는 이들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2권에서는 신동, 강간 피해자, 범죄자, 트랜스젠더 가족을 다룬다. 역시 고통스러웠지만 1권보다는 조금 덜했다.
이 책을 읽고 수평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진정한 걸작이고 모든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집필에 무려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시시한 책 여러 권을 쓰는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훌륭한 작품을 한 편 남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주말에 부모님이 친구 부부와 여행을 가셨다. 부모님 댁에서 2박 3일 동안 혼자 지내며 새롱이를 봐주었다. 토요일 오전에는 근처 공원으로 개를 데리고 나가 HJ와 장모님을 만났다. 여태 몰랐는데 장모님도 나처럼 엄청나게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새롱이를 보고 싶어 했다.
HJ가 장모님 옆에서 목줄을 잡고, 내가 뒤를 따라갔다. 새롱이는 뭐 누가 자기 목줄을 잡든 봄날에 밖에 나와 있는 게 좋아서 그저 신나 있었다. 동네 도서관까지 걸어갔다. HJ가 장모님과 함께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빌리는 동안 나는 개와 밖에서 기다렸다. 장모님이 김밥을 싸 오셔서 그걸 점심으로 먹었다.
이날 저녁에는 W를 부모님 댁으로 불렀다. 제주도에서 올라오면 다시 만나 맥주를 한 잔 하기로 했었다. 술집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 댁에서 마셔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W는 뭐가 문제냐고 되물었다. 나야 당연히 술집보다 부모님 댁에서 마시는 게 편하다. 그래서 배달 치킨을 주문하고 찬 맥주를 여러 종류 준비해서 W를 기다렸다.
W는 대학 같은 과 동기이고 HJ는 같은 과 후배라서 W와 HJ도 서로 잘 안다. 우리는 거의 20년 동안 같이 술을 마셨고 밥을 먹었고 영화를 봤고 서로의 집에 갔다. 더블데이트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HJ를 부르지 않았는데, 우울증 초기 증세를 겪고 있었던 W가 HJ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W는 이번에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우울증은 다 나았다고 덧붙였다. 나나 HJ보다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녀석이었다. 우리는 치킨과 장모님이 싸주신 김밥을 안주로 먹으며 맥주를 여러 캔 마셨다. W는 라거가 아닌 맥주는 마시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네스 엑스트라 스타우트는 내가 마셨다.
기네스 엑스트라 스타우트는 기네스 드래프트와 달리 질소가 아니라 탄산을 사용한다. 쓴 맛도 좀 더 강조되어 있다. 나는 그 커피 풍미와 톡 쏘는 느낌을 좋아한다. 많은 맥주 애호가들이 그 ‘목 넘김’을 비웃지만 나는 좋은 걸.
그렇게 이 검은 맥주를 마실 때까지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 못했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몰라
그날 낮에 만났던 네이버웹툰 직원들처럼 W도 요즘 인터넷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나하나 흥미롭고 모르던 얘기라 귀를 기울이며 재미있게 들었다. 그러다가 커뮤니티 커머스라는 개념을 듣고 머릿속에서 이상한 상상이 폭발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HJ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당장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W에게도 HJ를 만나러 가자고 강권했다. W에게도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술기운이 더해져서였겠지. 놀랍게도 HJ도 W도 내 말을 따랐다. 설득이 불가능할 정도로 취해 보여서였을까.
처음에는 우리 집과 부모님 댁 중간에서 만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려 했는데 HJ가 그냥 우리 집에서 얘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나는 우리 집에 새롱이까지 데려갔다. 다행히 새롱이는 우리 집에서도 어색해하지 않고 신이 나서 거실과 현관을 뛰어다녔다.
제주도 한달 살기를 할 때부터 HJ는 독서 운동에 대해 구상하고 있었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독서 운동 혹은 이주 여성을 돕는 일 둘 중 하나를 하고 싶다고 했다. 독서 운동은 자기가 책을 좋아해서, 이주 여성을 돕는 일은 처제가 스위스에 있는 이주 여성이고, HJ 본인도 한때 호주에서 이주 여성이었기에.
HJ는 내가 『책, 이게 뭐라고』에 썼던 독서공동체, 『책 한번 써봅시다』에 썼던 ‘책이 중심이 되는 사회’, 『당선, 합격, 계급』에서 지적했던 서평 문화의 부재에 대해 자기 의견이 확고했다. 트레바리와 굿리즈, 최근의 살롱 문화 유행에 대해서도 살피고 혼자 분석하기도 했다. W의 이야기를 들은 HJ는 자기가 구상하던 온라인 플랫폼을 실현할 방안이 이것임을 깨달았다.
같이 회사를 세우자.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자.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자! 그 무게중심이자 길잡이로 책만큼 좋은 것은 없다. 하지만 독서 모임 이상의, 지식공동체를 만들자. 책 말고 영화, 음악, 정치 이야기도 할 수 있는. 회사 이름은 ‘그믐’으로 하면 어떨까 해. 짧고 외우기도 쉽고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도 좋고 ‘ㄱ’으로 시작하니까. 영어로는 ‘gmm’이라고만 쓰면 되니까. 암흑기에 처한 우리 문명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은 그믐달처럼 미약하고 사라지는 신세니까. HJ와 내가 번갈아 그런 이야기를 했다.
놀랍게도 W는 단박에 우리 이야기를 알아들었다. 게다가 꽤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 같았다. W는 우리가 펼치는 주장에 대해 이런저런 반론을 제기했는데 그믐 아이디어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여서였다.
나는 밤에 부모님 댁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에는 자신감이 많이 준 상태였다. 숙취에 시달리며 HJ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될 거 같아? 하고 싶어?” 내가 물었다. HJ는 그믐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전날 이미 우리는 회사 대표는 HJ가 맡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HJ는 자기가 진심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보다 더 책을 좋아하고, 책 읽는 사람들이 감소하는 현실도 가슴 아프게 여겼다. 그래서 이 일을 소명으로 여기고 추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W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다시 의사를 묻지는 않았다. W는 그믐을 할 마음이 있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해 온 콘텐츠 관련 스타트업에 대해 그는 “보배로 만들기 위해 구슬을 꿰는 작업들을 했는데 구슬이 우리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 구슬들을 확보하기 위해 큰 자금을 들여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부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독서 모임이라는 분야는 비록 큰 시장은 아니라도 그런 구슬들을 쉽게 모을 수 있다고 W는 설명했다. 한번 해보지, 하다 안 되면 접지 뭐. W도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HJ는 그날 낮에 그믐 구상을 토론할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었다. 나는 저녁에 혼자 새롱이를 산책시켰다. 걸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믐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A 출판사 건을 마무리 지은 데 대해서도 생각하고, 지겹게 오래 붙들고 있는 장편소설 원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밤에 새롱이는 거실의 제 집에서 낑낑대며 나를 불렀다. 부모님하고만 있을 때에는 혼자 잘 자는데, 조카들이 오면 그렇게 밤에 옆에 있어달라고 어리광을 부리고 보챈다고 들었다. 자다가 몇 번씩이나 깨서 거실로 가서 달랬는데, 잠잠해지는 건 그때뿐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그날 밤 잠을 거의 못 잤다. 결국 새벽에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서 눈을 붙였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기일에 완독했다. 100년 전 소설가가 이렇게 현대적으로 다가온다는 게 신기했고, 1920년대 한국 소설 중에 여기에 비길 수 있는 작품이 뭐가 있을까 솔직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아쿠타가와의 작품들이 이토록 위화감 없이 다가온다는 것은, 그의 작품에 그만큼 그가 살았던 시대가 별로 담겨 있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