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배차 해드릴까요?”
방송작가가 물었고 나는 ‘설마 우리 집까지 차를 보내주겠다는 말인가?’ 하고 놀라면서 “네”라고 대답했다. 방송국에서는 정말 우리 집 앞까지 차를 보내주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스타렉스 차량이었다.
전에 해외에 있다가 귀국하자마자 바로 스튜디오로 가느라 방송사의 차량 지원을 받은 적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집으로 배차 서비스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영화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에는 스타렉스 좌석 등받이를 뒤로 잔뜩 젖히고, 거의 드러누운 자세에서 편안히 방송국으로 향했다.
녹화는 오후 5시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집에서 오후 2시 반에 차를 잡아탔고, 오후 4시가 되기 조금 전에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오전에는 집을 청소하고 근력 운동을 했다. 점심은 굶었다. 대신 두유를 탄 홍차와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다.
촬영장에 도착해서는 담당 방송작가와 대본을 최종 확인하고 화장을 받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대기실에 도시락이 나왔으나 먹으면 졸릴 것 같아 먹지 않았다. 방송작가 한 명으로부터 인공눈물을 빌려 점안했다.
날씨가 우중충해서인지, 이제 내가 중늙은이어서인지, 녹화 직전까지도 마음이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거의 침울하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TV 교양예능 프로그램에 임하는 자세로는 매우 부적절했다. 뺨을 치며 “텐션 끌어올리자, 업, 업!”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려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프로그램은 하루에 두 회분을 촬영했다. MC 두 사람과 고정 게스트 두 사람은 이미 한 회분 촬영을 마치고 지친 상태였다. 나는 그날의 두 번째 회차 촬영에 다른 게스트들과 함께 참여했다.
초보 방송인으로서 나는 다른 패널이 가볍게 나를 면박줄 때 말문이 막히거나 울면서 도망치지 않고 엉뚱하게나마 대꾸를 하는 수준의 능력이 있다. 그러면서 나 역시 다른 패널에게 면박을 주기도 한다.
초보 방송인으로서 내가 이런 토크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 출연 요령 하나는, 하여간에 말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말하면 끼어들어서 몇 마디라도 아는 걸 늘어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병풍마냥 멀거니 앉아 있다가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보며 귀가하게 된다.
아는 대로 그렇게 열심히 했다. 너무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 보니 MC 두 사람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다. 내게 ‘수다 모드’라는 버튼이 있어서 그게 눌려 있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제 힘으로는 그 버튼을 끄지 못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보통은 세 시간이면 녹화가 끝난다는데, 이날은 네 시간이나 걸렸다.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았고, 대신 몹시 착잡한 기분이었다. 돌아올 때에는 역시 방송국에서 제공한 스타렉스를 탔다. 창백한 가로등이 검은 도로와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휙휙 지나갔다. 내가 네 시간 동안 떠들어댄 말들, 끼어들었던 순간들을 곱씹으며 돌아왔다.
이것이 자의식 과잉에서 비롯된 건강하지 않은 증세임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 말을 많이 하고 온 날이면 자기검열을 하면서 자책감에 빠진다. 짧으면 한나절, 길면 며칠씩 그런다. 이날은 그 증세가 일찍 시작됐다.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아서 벌어지는 일이며, 나르시시즘의 불쾌한 측면이다.
HJ가 마트에서 프라이드치킨을 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을 닦으려고 세수를 할 때 그녀는 “비누로는 잘 안 지워져”라며 클렌저를 내밀었다. 치킨을 에어프라이어로 데우고, 냉장고에서 ‘스트레인저 댄 픽션’을 꺼내 마셨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맥주 회사 콜렉티브 아츠 브루잉에서 만든 포터 맥주다.
콜렉티브 아츠 브루잉은 지역 예술가들과 협업해 병이나 캔의 라벨을 만든다. 내용물이 같은 제품에도 다른 라벨을 붙이기도 한다. 내가 마신 캔에는 고양이 같은 두상에 눈이 세 개 있고 사막여우 같은 큰 귀가 달린 짐승의 얼굴이 검은 바탕 위에 그려져 있었다. 캐나다 워털루 시에 사는 로버트 카터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라고 했다.
눈 셋 고양이
그 고양이 주변의 어둠
그 안의 검은 술
포터와 닭튀김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치킨을 먹다 남기고 찬장에서 캐슈넛을 꺼내 왔다. 어떤 맥주를 마시건 앞으로 마트에서 완제품 프라이드치킨을 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전용 반조리제품들을 에어프라이어로 데워 먹는 편이 훨씬 더 맛있다. 에어프라이어를 경험한 이후 일반 술집들의 운명을 심각하게 걱정하게 됐다.
방송 녹화에 대해서는 별 말 없이 스트레인저 댄 픽션을 홀짝홀짝 마셨다. 얘기하면 HJ는 틀림없이 “괜찮아, PD들이 다 편집해줘”라고 위로해줄 테지. 그 말이 옳다. 나도 안다. 나는 내가 한 말들, 행동들을 너무 신경 쓴다. 그 버릇이 고쳐지지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평생 이러고 살겠지? 아, 지긋지긋해.
엄청나게 통렬하다. 감탄한 대목도, 본받고 싶은 지점도, 속시원한 부분도 많았다. 그런데 그토록 되풀이해서 욕을 퍼부을 정도로 문단을 증오할 필요까지야 있을까. 그냥 신경 끊으면 되지.
정주(定住), 언어경제학, 평민 문자문화와 같은 개념들은 물론 흥미로웠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떤 조롱이나 분노의 표현도 섞지 않은 진지한 화법이었다.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이자 사회운동가가 우주, 생명, 인간에 대해 말한 강연 원고. ‘더 적은 수의 어린이를 위한 더 좋은 세상’이 우리의 목표라고 주장한다.
사탕수수의 자당(蔗糖)이 어떻게 유럽에 받아들여졌고, 어떻게 다양한 계급적 표상이 되었고, 어떻게 식민지 경제시스템의 한 부분이 되었는지 소개한다. 흥미로운 주제이나 엄청나게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에 관한 책. 베조스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와는 달리 컴퓨터가 너무 좋았던 것도 아니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도 없었다고 한다. 인터넷 서점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게 초기 전자상거래에 적합한 아이템이라서였다고.
읽다 보면 중간 즈음 제목이 왜 ‘4주’인지 궁금해진다. 평범한 일상을 훈훈하게 그리는 4컷 만화가 아니라서 그렇다. 표지를 자세히 보면 힌트가 있다. 나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신기하다.
절반쯤 읽었을 때 먼저 읽은 이에게 물었다. “왜 2인칭 시점인 거죠? ‘저’는 이러지 않을 건데요.” 책이 끝나갈 때 답이 나온다. 이상한 차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재능과 미모를 타고나 상처입고 사랑받으며 방랑하는 이방인 고아 소녀… 마지막에는 모성을 지니고 문명 밖 시원(始原)으로 돌아간다. 너무 편리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책 속 1960년대 서울의 젊은이들은 글로 접한 제정러시 아 말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청년들과 비슷해 보였다. 우울하고, 관념적이고, 시간이 많고, 시나 소설을 쓰고, 자살을 꿈꾸고, 난폭하고, 야만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