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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맥주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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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써스데이와 F 코드

비 오는 목요일이었다. 오후 2시께부터 자정 넘어서까지 쉬지 않고 비가 왔다. 조금 늦게 일어났고, 그 때문에 오전에는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집 근처 분식집에 가서 들깨수제비를 먹었다. 고농도 탄수화물 덩어리를 흡입했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았고 반대로 죄책감만 들었다.

대체 무엇에 대한 죄책감이란 말인가. 내 몸이 뚱뚱해진다고 누구에게 피해를 준단 말인가. 왜 이렇게 습관적으로 죄책감을 느낄까. 나는 궁금해 한다. 이 감정에 중독된 사람 같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가톨릭 신자로 자랐기 때문일까?

낮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에도 역시 빈둥거리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우산을 쓰고 헬스장에 갔다. 달리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화영어 수업을 받았다. 내가 밖에 있고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하니 필리핀 영어 강사는 조금 놀랐다. 서울에서는 겨울에 비가 오지 않고 눈만 내리는 줄 알았다고 한다.

소설을 쓰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기타를 챙겨 다시 집을 나섰다. 기타 케이스를 메고 우산을 쓰기 어렵다. 지난 수업 시간에 겨우 C코드와 G코드를 배웠는데 이번 수업 시간 한 시간 동안 A 마이너, E 마이너, F, D 마이너 7까지 네 코드를 배웠다. 물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바로 곡을 주면서 연습하게 시키는 스타일이었다. 그 첫 번째 곡이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어서 기분이 좀 묘했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 이 곡이 제법 비중 있게 두 대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F 코드는 너무 어려워서, 과연 내가 이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지경이었다. 알토 색소폰을 배울 때도 이랬던가? 기타는 초보자가 배우기 쉬운 악기 아니었나? 내 손가락과 손톱 모양이 문제인 걸까?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법 긴 터널이 하나 있다. 보행로와 차도 사이에 유리벽이 세워져 있다. 폐소공포증이 있거나 강도를 두려워하는 행인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스피커가 곳곳에 설치돼 있다.

하늘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잠시지만 시간 감각도 사라지게 되고, 거기에 지하 감옥에 있는 듯한 삭막한 터널 분위기와 음악의 부조화가 겹쳐 이곳을 지날 때면 늘 이상한 기분이 든다. 프랑스 예술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또 그런 무드에 빠져 기타 케이스를 메고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앞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여인이 어쩐지 낯익어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가보니 마스크를 쓴 채 시치미를 뚝 떼고 걸어오는 HJ였다. 내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인 것 같아 퇴근길에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터널로 들어왔다고 했다. 둘이서 나란히 우산을 쓰고 귀가했다.

HJ는 내게 그날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기타가 원래 이렇게 어려운 악기냐고, 주변에 잘 치는 사람이 많아서 배우기 쉬운 악기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기타 어려워. 난 자기가 이번 기회에 교훈을 얻으면 좋겠어. 자기는 남들이 하는 걸 다 우습게보잖아.”

HJ가 말했다. 그리고 그래도 기타가 첼로나 바이올린보다는 쉬운 악기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어릴 때 첼로를 배운 적이 있다.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색소폰의 진입 장벽이 기타보다 낮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HJ의 지적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목요일이니까, 하면서 냉장고에서 써스데이 맥주 캔을 꺼냈다. 남은 닭똥집튀김과 핫도그 하나를 에어프라이어로 조리했다. 겨자 소스를 뿌려 먹으니 닭똥집튀김이 지난번과 완전히 다른 맛이 났다.

써스데이는 2007년 설립돼 이런저런 혁신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는 독일의 맥주 회사 앤드유니온이 만든 다크 라거다. 효모를 걸러내지 않았고 저온 살균도 하지 않았다는데, 그 때문인지 아주 맛있다. 전에는 노이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는데 회사가 상품명을 바꿨다.

이제 앤드유니온의 회사의 맥주는 전부 요일 이름이다. 프라이데이 맥주는 인디아 페일 에일이고, 새러데이는 라거, 선데이는 페일 에일이라는 식이다. 써스데이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 어두컴컴한 날이니까 다크 라거인 걸까? 아직 개발 중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는 현재 월요일 맥주는 없다. 튜즈데이는 무알콜 맥주다.

 

남들이 하는 일을

우습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목요일의 교훈



256. 혈의 누 (이인직)

‘피눈물’이라는 제목처럼 주인공 가족의 인생이 참 기구하기는 하지만 끝에는 모두 잘 풀린다. 워싱턴에 가보지 않고 주인공 부부의 워싱턴 유학 생활을 패기 있게 적었다. 이인직이 친일파여서 일본에 노골적으로 우호적인 서술이 많지만, 일본인 양모가 점차 주인공을 구박하게 되는 등 아주 단순하지만은 않다.

혈의 누 (이인직 장편소설 다시읽는 한국문학 026)
혈의 누 (이인직 장편소설 다시읽는 한국문학 026)
255.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그래디 헨드릭스)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제목이 발랄하고 도입부도 그러하지만, 중반 이후로는 상당히 어둡고 무거워진다. 멋진 페미니즘 소설이기도 하고, 인종차별과 도시 외곽 빈곤지역 문제를 진지하게 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저자의 유머 감각이 뛰어나서 몇 번 크게 웃기도 했다.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254. 제일버드 (커트 보니것)

이 소설은 1980년대에 한국에 몇 번 출간되었는데, ‘죄수와 여재벌’이나 ‘야망의 여재벌’ 같은 괴이한 제목을 달고 나왔다. 뭐, ‘죄수와 여재벌’은 내용을 잘 요약한 문구이긴 하다. 나는 1990년대에 웅진출판에서 낸 버전으로 읽었다. 산상수훈에 대해 처음 깊이 생각하게 만든 책. 보니것의 다른 글은 꾸준히 번역되는데, 이 작품이 절판 상태인 게 좀 아쉽다.

제일버드
제일버드
253. 쥬라기 공원의 과학 (베스 샤피로)

공룡이 아니라 매머드를 복원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 원제도 ‘How to Clone a Mammoth: The Science of De-Extinction’이다. 미라에서 DNA를 추출하는 기술에서부터 멸종된 동물을 되살릴 때 맞닥뜨리게 되는 생태학적, 윤리적 고민거리까지 다룬다. 책을 읽고 나면 인간이 멸종시킨 동물을 인간이 되살려야 한다는 논리가 그리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쥬라기 공원의 과학
쥬라기 공원의 과학
252. 동물들의 비밀신호 (울리히 슈미트)

동물이 가진 이런저런 신기한 감각 능력에 대한 이야기들. 자기장 라인이나 전기신호를 읽고, 편광을 보고, 벡터 계산을 본능적으로 하는 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며 가볍게 읽었다. 인간에게도 흔히 말하는 다섯 가지 감각 외에 중력의 방향이나 몸의 회전,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동물들의 비밀신호(양장본 HardCover)
동물들의 비밀신호(양장본 HardCover)
251.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오카다 다카시)

나도 혼자가 편한 사람이라 솔깃한 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 정신과 의사이고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는 회피형과 불안형 인간이라는 유형을 정하고 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런저런 문제를 겪는다고 설명하는데, 약간 순환논리처럼 느껴지는 대목도 있었다. 유명인들의 사례가 재미있다.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16. 윌리안 라들러와 비비크림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완화하면서 헬스장이 영업을 재개했다. 저녁에 가서 운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기구를 기다려서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욕조에 몸을 담그니 좋았다. 온수가 잘 안 나오는 집에 살고 있다. 이날 점심은 굶었고 오후에는 거실 바닥을 청소했다.

페이스북에서 누가 나를 저격했다고 후배 기자가 알려주었다. 그가 갈무리해서 보내 온 글을 읽어보니 기도 안 차는 내용이었다. 틀리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한 부분을 빼면 거의 남을 게 없는 글이었다. 본심은 아마 ‘내가 너보다 더 똑똑하다, 너와 다른 사람들은 세상 문제에 오지랖을 부려서는 안 되지만 나는 그래도 괜찮다’인 듯했다.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음을 개운하게 정리하지도 못했다. 매번 이렇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니 만만해 보이는 걸까? 한번이라도 상대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고 나면 억울한 심정은 들지 않을까?

다음날에는 동네 도서관이 부분 개관했다. 열람실은 안 되지만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것은 가능해졌다. 글도 안 써지고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르려 해서 아침에 가서 전에 대출했던 책을 반납하고 새 책을 빌려 왔다.

집에 와서 책을 놓고 곧바로 다시 나갔다. 닭곰탕집에 가서 고기를 추가한 닭곰탕을 포장해 왔다. 그 한 그릇이면 HJ와 내가 둘 다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닭곰탕집 옆 오므라이스 전문점은 여전히 문을 닫은 채였다. 아무래도 폐업한 것 같았다.

점심은 굶었다. 재택근무를 하던 HJ가 혼자 닭곰탕을 조금 먹었다. HJ가 일하는 동안 거실이 아닌 구역들을 청소했다. 나쁜 생각들을 떨치기 위해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려 했다.

저녁에는 헬스장에 가서 트레드밀에서 30분간 5킬로미터 남짓을 뛰었다. 헬스장은 이날도 북적거렸다. 오후 9시까지만 영업을 하게 한 것이 오히려 방역에는 악영향을 미치는 것 아닌가 싶었다. 퇴근 뒤 오후 7시에서 자정 사이에 몸을 풀던 회사원 고객들이 저녁 시간대에 몰리는 것 같았다.

HJ가 남긴 닭곰탕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밤에는 멍하니 웹서핑을 하다가 자정을 넘어 잤다. 자다가 눈이 떠졌고, 그래도 몇 시간은 잔 줄 알았는데 새벽 1시였다. 다시 잠이 오지 않아 책을 좀 읽다가 새벽 3시가 넘어서 다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늦잠을 잤다.

늦잠을 잔 날 오전에는 에세이 메일링 서비스를 위한 원고를 썼다. 도저히 더 미룰 수 없었다. 쓰고 있는 글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 ‘내가 왜 이걸 쓰고 있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고료라도 높았다면 그런 생각을 안 할 텐데.

바쁜 하루였다. 점심은 거르고 헬스장에 가서 근력 운동을 했다. 집에 와서 전화영어 수업을 듣고, 다시 나갈 차비를 했다. 한겨레신문에서 운영하는 한겨레TV에서 책 소개 코너를 만드는데 그 1회 출연자로 나가야 했다. 재택근무 중이던 HJ가 얼굴에 비비크림을 발라 주었다.

한겨레신문사 3층에서 한겨레출판 편집자들을 만나 스튜디오에 올라갔다. 한겨레출판 문학팀장과 신입 편집자가 나를 맞이했는데, 신입 편집자는 그날이 첫 회사 첫 출근일이라고 했다. 아직 대학생이었고 다음 달 졸업 예정이었다. 전에 김원영 변호사의 관객 참여형 연극에서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녹화에는 한 시간 남짓 걸렸다. 편집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책 일부를 낭독하는 사이 내내 집중을 못하고 딴 생각을 했다. 신문사도 출판사도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어야 하고 작가도 얼굴에 비비크림을 바르고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시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시대에 대해 신문사와 출판사 직원들에게 의미 없는 농담을 던지고 싶었다.

배가 고파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역에 있는 빵집에서 깨찰빵을 세 개 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나 먹었다. HJ가 에어프라이어로 닭똥집튀김과 몽골리안치킨을 데워 주었다. 그 음식들을 먹으며 윌리안 라들러, 호가든, 기네스 오리지널을 순서대로 마셨다.

라들러는 맥주에 탄산수나 다른 음료를 섞은 가벼운 맥주 칵테일이다. 독일어로 라들러는 자전거 주자라는 뜻인데, 마시고 자전거를 타도 괜찮을 정도로 알코올 농도가 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나. 윌리안 라들러는 라거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혼합했다. 마튼즈 바이젠을 만드는 그 회사, 마튼즈 브루어리에서 만든다.

 

맥주 마시고 자전거 탔다가

넘어져서 데굴데굴 구른 적이 있지

주의하겠습니다

 

맥주 칵테일하니 폭탄주도 생각나고, 맥주와 막걸리를 섞어 마시는 ‘맥막’의 기억도 떠오른다. 회사 다니던 시절 그런 막걸리 칵테일을 맛있게 몇 번 마셨다는 얘기를 해주니 HJ는 괴식이라며 기겁한다. 하지만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막사’는 그녀도 몇 번 마셨다고 한다.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듯한데.

닭똥집튀김은 처음 한두 개를 먹을 때는 맛있었는데, 금세 물리고 속이 거북해졌다. 나는 닭똥집구이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파는 곳이 없다. 마트에서도 튀김으로는 파는데 구이는 팔지 않는다. 이제는 찾는 사람이 없나?

 

250.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김훈)

‘한국현대사는 고통분담의 역사적 체험을 축적하는 성장과정에서 꾸준히 실패해 왔다’는 문장에 깊이 공감. 지금도 물론 실패 중이며, ‘고통을 분담하는 도덕적 원리’는 여전히 아득하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249. 풍경과 상처 (김훈)

사유가 깊어지면 문장은 자연스럽게 비장해지는 걸까, 아니면 이 비장함은 그저 글쓴이의 개성일까.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이 ‘예’라면, ‘경쾌한 문장에는 얕은 생각밖에 담을 수 없다’는 대우 명제도 옳은 걸까.


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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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금) 이번 그믐밤엔 소리산책 떠나요~
[그믐밤] 29. 소리 산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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