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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맥주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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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망내인 (찬호께이)

인정할 점은 인정하고 시작하자. 홍콩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의 장편소설 『망내인』(한스미디어)은 작가의 대표작 『‘13.67』에 못 미친다. 『망내인』이 수준 미달이어서가 아니고, 『13.67』이 워낙 뛰어나서 그렇다. ‘13.67’에 감명 받아 『망내인』을 집어든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두 작품을 비교하게 될 텐데, 전자에 비해 후자는 다소 이야기가 헐겁고 캐릭터들이 피상적이다. 신분을 감추고 은둔 중인 천재 해결사 해커라는 설정이 너무 편리하고, 실감이 잘 안 난다.

하지만 『13.67』을 잊고 『망내인』만 본다면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 손색이 없고 주제의식도 단단하다. 사건과 인물들을 소개하는 초반만 넘어가면 이 712쪽짜리 책에서 손을 놓기 어렵다. 한국 제작사가 판권을 사들여 OTT 드라마로 만드는 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연출은 김지운 감독이 맡는다고. 바로 윗 문단에서 실감에 대한 쓴소리를 적었지만 찬호께이는 대학에서 컴퓨터과학을 공부했고 IT 기업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기도 했다. 소설 속 묘사가 허황되게 들릴 정도는 아니라는 말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인터넷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다루는 소설이다. 악플에 시달리던 한 소녀가 자살한다. 언니는 그 죽음을 납득할 수가 없다. 악플의 근원을 찾다 보니 동생 주변의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계획한 공작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경찰은 ‘범인’을 찾아도 처벌하기 어려울 테니 포기하라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통할 이야기 아닌가.

소설에는 ‘네트워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있다. 『망내인』은 현대인이 인터넷에 사로잡히는 두 가지 방식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인터넷을 통해 경제활동, 사회활동을 하면서 거대하고 정교한 감시체제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 첫째다. 둘째는 우리의 정신이 인터넷을 새로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거기서 오가는 말들에 휘둘리며 심지어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훨씬 더 무책임하게 말한다. 그 말들을 조작하기도 쉽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시대의 사회파 추리소설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망내인 - 네트워크에 사로잡힌 사람들
망내인 - 네트워크에 사로잡힌 사람들
75. 조현병의 모든 것 (E. 풀러 토리)

760쪽 분량인 E. 풀러 토리의 『조현병의 모든 것』(심심)을 집어 든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퓰리처상 수상작가 론 파워스가 쓴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를 감동적으로 읽은 뒤 이 병을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범죄 사고를 여러 차례 기사로 접하는 동안 과연 그들을 내 이웃으로 둬도 괜찮을지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 이 병은 곧잘 여러 가지 상징이나 비유에 동원되는데 그게 얼마나 적절한지도 궁금했다.

그런 정도의 의문을 품은,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없는 교양 독자가 읽기에 좋은 책이었느냐. 그랬다. 조현병과 가까이 있지 않은 이들에게도 추천한다. 어려운 용어 없이 술술 읽히는 문장으로 되어 있고, 복지서비스, 개인의 자유, 폭력, 현대 사회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대목이 많다. 두려움 속에 서로를 비난하며 사는 환자 가족들의 삶을 상상하거나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 어떤 조건에서 성립하는지 같은 문제를 고민하느라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여러 번 멈춰야 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여전히 어떤 딜레마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현대의학은 이 병의 원인조차 제대로 모르는 상태다. 환자의 내면은 나의 이해 밖이다.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없게 되는 것, 헛것을 보고 주인 없는 목소리에 시달리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나는 이 병이 지닌 모순과 잔인함을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병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들, 이 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들의 모순과 잔인함에 대해서는 조금 알게 되었다.

책을 읽고 조현병을 얼마나 많이 알게 됐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이 병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많이 알게 됐다고. “조현병 환자를 이웃으로 둬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은 이제 몹시 투박하게 들린다. 이미 내 이웃 중에, 지인 가족 중에 환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한사코 그 사실을 숨기고 있을 뿐. 100명 중 1명꼴로 조현병을 앓는다고 한다. 그렇게 흔한 질환이다. 그런데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주민이 2000명이 넘는다.

 


조현병의 모든 것 - 35년의 연구 결과를 축적한 조현병 바이블
조현병의 모든 것 - 35년의 연구 결과를 축적한 조현병 바이블
74. 기 드 모파상 (기 드 모파상)

 

한때 소셜미디어 계정 프로필에 ‘맥주, 자전거, 아이러니를 좋아한다’고 적었더랬다. 맥주는 맛있고 시원해서, 자전거는 타면 즐거워서 좋아한다. 아이러니는 왜 좋아하느냐. 다른 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삶과 세계에 대한 어떤 진실을 아이러니가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기에 끌린다.

세상은 복잡하다. 삶도 복잡하다. 그 복잡함은 한 사람의 이해를 훌쩍 뛰어넘는다. 인간은 논리를 세우고 모델을 만들지만 결국 인생도 세상도 우리의 공들인 전략을 비웃고 간절한 기대를 배신한다. 성실한 자를 처벌하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에게 보상을 주고, 그래서 만사 포기하려는 순간 갑자기 선물을 안기기도 한다.

현대문학에서 나온 『기 드 모파상』에는 모파상이 길지 않은 작품 활동 기간에 쏟아내다시피 써낸 단편소설 300여 편 중 63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은 현대 기준으로는 단편이라기보다는 엽편 쪽에 가깝다. 808쪽짜리 책에 63편이니까 편당 평균 길이는 12쪽 남짓이다. 책 자체는 두껍지만 콩트집 읽듯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말하는 작품에서부터 괴기소설로 분류해야 할 단편까지 주제와 소재는 실로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나는 결말이 아이러니한 글들에 특히 매료됐다. 모파상은 아이러니의 대가다. 대단히 효율적으로 아이러니의 앞부분을 쌓아올리고 정확한 호흡으로 주인공과 독자를 낭패감에 빠뜨린다. 그 낭패감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 믿었던 생각이 틀려서일 수도 있고, 성실하고 선량하다고 믿어온 특정 인물이 실망스럽게 행동해서일 수도 있다.

기대와 실체의 괴리 앞에서 신념이나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을 저자는 비웃는 걸까. 모파상은 인간혐오자일까? 「목걸이」 같은 단편을 여러 번 읽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작가가 그런 속물성에서 벗어나기 힘든 우리네 삶에 덤덤히 연민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주의 작가로 불린 그는 그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썼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께 읽고 따뜻한 책이냐, 차가운 책이냐를 한참 이야기했다. 토론은 즐거웠고 좀처럼 결론은 나지 않았다.

 


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73. 게스트 (세라 워터스)


동성애가 가혹하게 배척되는 시대에 두 젊은 여인이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진다. 성애 묘사가 무척 관능적이면서도 아름답다. 그런 그들을 둘러싸고 범죄가 벌어지는데, 이들은 경찰의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는 처지다. 일은 점점 꼬이고, 이 연인들은 범죄의 진상을 놓고 서로를 불신하게 된다…….

세라 워터스의 대표작 『핑거스미스』(열린책들)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고, 오늘 소개하려는 『게스트』(자음과모음)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두 책 모두 한국 번역본 기준으로 700쪽이 넘어가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며, 여성과 성소수자가 받는 차별을 말하고, 배경이 되는 사회 풍경 묘사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두 작품 사이에 차이점도 있다. 『게스트』는 『핑거스미스』처럼 현란하게 플롯을 꼬아놓지는 않았고, 이야기의 호흡도 느리다. 『핑거스미스』처럼 반전이 촘촘히 들어 있는 화끈한 서스펜스를 기대하고 집어 들었다간 실망할 수도 있다. 범죄가 발생하는 것도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고 나서다. 『게스트』는 추리물이라기보다는 흡인력 있는 드라마이며, 인물들의 고통에 보다 집중한다.

이 소설의 연인들은 『핑거스미스』의 주인공들과 달리 강단이 있지도 않고, 야무지지도 않다. 행동도 부족하다. 대신 그만큼 그들을 둘러싼 상황이 더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게스트』의 연인들은 『핑거스미스』의 주인공들보다 더 좌절하고 더 두려워한다. 거기에 공감하고 몰입하는 데 독자의 성적 지향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의 죄와 그에 합당한 벌에 대한 고민은 끝내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핑거스미스』처럼 휘몰아치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문장들에 더 여유가 있었던 걸까, 보다 현대에 가까운 시대가 배경이어서일까. 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사회를 살아가는 갑남을녀들의 좌절과 공허함도 잘 전달된다. 많은 이들이 가족을 잃었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일자리가 없어 울분에 차 있다. 경제난 속에 희망은 보이지 않고, 특히 여성은 독립하기 어렵다. 책장을 덮을 때에는 주인공 연인들뿐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등장인물들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게스트
게스트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2> 4회가 올라왔습니다. ^^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2> 4회를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소설과 PPL>이라는 제목으로 간접광고와 브랜디드 콘텐츠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생각들을 적어 보았습니다. ^^


#소설가라는이상한직업2 #간접광고 #브랜디드콘텐츠 #알라딘투비컨티뉴드


https://tobe.aladin.co.kr/n/282139

『킬러 문항 킬러 킬러』 언론 서평들


제가 기획하고 소설가 14명이 참여한 앤솔러지 『킬러 문항 킬러 킬러』를 여러 언론에서 길게 다뤄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한겨레신문>

킬러 문항이 없어진 대신 빠른 시간 많은 문제를 푸는 게 관건이 된 수능 탓에 집중력 강화제가 입소문을 타더니 “대치동에선 그 약을 구하지 못한 부모는 친부모가 아니라는 농담이 돌았다”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장강명의 표제작, 오직 내신을 위해 학교를 자퇴시키려는 부모와 그를 응원하는 학교 교사의 모습을 옮긴 이기호의 ‘학교를 사랑합니다: 자퇴 전날’, 그밖에 정아은·박서련·정진영·주원규·김현 등의 단편이 엮였다. 하여 문학의 현장은 답이 아닌 질문을 보게 한다. 2024년 교육 세계를 “슬프고 괴롭고 기괴하다” 감각시키고, 모순에 감응토록 한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716319?sid=103


<경향신문>

14인의 작가와 이들의 소설을 경유해 전해진 2020년대 교육 현장은 지켜보기 무척 괴로운 것이다. “저희가 본 것을 같이 봐주시고, 함께 괴로워해 달라”는 장강명의 말대로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2/0003332616?sid=103


<서울신문>

윤석열 대통령은 ‘킬러 문항’을 사교육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이를 배제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이 ‘킬러 문항’ 논쟁 자체는 현행 입시 제도를 둘러싼 문제가 얼마나 첨예하며 또 풀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준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494908?sid=103


<연합뉴스>

"네가 정말 다른 수험생들과 동등하게 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믿니? 여태까지 네가 누린 혜택들을 떠올려보렴. 너처럼 해마다 미국으로 영어 캠프를 다녀올 수 있었던 학생이 네 또래 중에 몇이나 될 것 같니?"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5041613?sid=103


킬러 문항 킬러 킬러
킬러 문항 킬러 킬러
『킬러 문항 킬러 킬러』 기획의 말


제가 기획한 앤솔러지 『킬러 문항 킬러 킬러』 기획의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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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일


 이 책은 한 지인이 내게 보내준 메일에서 시작됐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하 사걱세)을 후원하던 그는 내게 개인적으로 단편소설을 청탁했다. 한국 교육 문제에 대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는 내용이라면 형식은 어떻게 되든 좋다는 조건이었다. 사걱세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다, 문제는 간판을 찾는 채용 시장에 있는 것 아닌가, 다행히 이 단체도 교육을 넘어 채용 시장으로 초점을 확대하고 있다는 말씀도 덧붙여주셨다.

 ‘브랜디드 콘텐츠’라고 해서 사기업의 브랜드나 제품을 홍보하는 목적의 단편소설이나 에세이를 간혹 요청받기는 한다. 하지만 개인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제가 단편소설을 쓰는 게 기대하시는 만큼 영향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여러 작가가 이 주제로 짧은 소설을 연재하는 게 어떨까, 같은 고료로 몇십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신문에 연재하는 게 어떨까, 작가들을 모으는 일은 제가 하겠다, 사걱세의 운동방향에 대해서는 저도 비슷한 비판의식이 있다.

 글을 연재할 매체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한겨레>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한겨레> 측도 흔쾌히 제안을 받아줬다. 나는 몇 년 전 우리 시대의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자는 뜻을 담아 몇몇 작가님들과 ‘월급사실주의’라는 소설 동인을 만들었다. 그래서 월급사실주의 소설가님들께 먼저 연락을 드렸고, 눈여겨보던 SF소설가인 서윤빈 작가님께도 연락했다.

 1회 글은 내가 썼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불과 150여 일 앞두고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 운운하면서 “공교육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의 문제를 수능에서 출제하면 안 된다”고 말한 즈음이었다. 교육부는 대통령의 말을 받들어 숨 가쁘게 움직였다. 대학 입시 담당 국장을 경질하고, 수능 문제를 출제하는 기관을 감사하기로 하고, 당장 그해 수능부터 ‘킬러 문항’을 없애겠다고 발표하고.

 그 모든 과정이 내 눈에는 어리석고 잔인한 코미디처럼 보였고, 어떤 측면에서는 이게 한국 교육정책의 역사이자 현 주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부모들의 혼란과 사교육시장의 대응, 그리고 그걸 감당해야 할 소년 소녀들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느 아침 풍경이 떠올랐고 그걸 글로 옮겼다. 그렇게 <킬러 문항 킬러 킬러>라는 짧은 소설을 <한겨레>에 실었다.

 신문 연재 이후 김현, 문경민, 박서련, 이기호, 이서수 작가님의 글을 더해 모두 열네 명의 소설가가 참여하는 앤솔러지를 내게 됐다. 함께해주신 모든 작가님들, 그리고 윤우람 님, <한겨레>의 이순혁 기자님, 한겨레출판의 최해경 팀장님, 박선우 편집자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


 <한겨레> 연재를 준비할 때 조율 과정이 쉽지 않았다. 참여하는 작가님마다 교육 문제에 대한 철학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연재 제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독자님들에게 무엇을 요청해야 할지 정하는 일도 조심스러웠다. 한국의 교육 현실이 슬프고 괴롭고 기괴하다는 사실에 반대하는 작가님은 없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단은 모두 달랐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에 대한 답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입시 제도가 문제일까? 순위를 매기는 시험이 문제일까?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나 성적만 따지는 교과 과정이 문제일까? 학벌을 따지는 문화 때문일까? 학교 선생님들이 게을러서일까? 사교육업체들의 불안 조성 전략 때문일까? 부모들의 잘못된 욕망 때문일까? 교육의 목적과 출세를 동일시하는 오랜 유교적 풍토 때문일까? 대한민국에 천연자원이 부족해서 ‘인적 자원’에 기댈 수밖에 없는 탓일까? 그에 대해 일관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고, 그러려는 게 우리의 목표도 아니었다.

 몇십 년 뒤에 이 문제를 바라볼 후대의 눈에는 정답이 선명하게 보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저 혼란스러운 질문들을 마주하는 것,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당대를 다루는 작가의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살아 있는 작가에게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그의 시대가 있고,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그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겪게 된다. 바로 그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쓸 때 그의 글에서 단순한 생생함 이상의 어떤 불꽃이 튀는 것 같다. 1920년대에 바이마르공화국과 조선 땅에서 나치와 일본군국주의에 대해 쓰는 것과, 2020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주제에 대해 쓰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 비교할 수 없다(비록 짧은 소설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작가가 그 불꽃을 손에 쥐었을 때, 글은 가끔 그 시대를 뛰어넘기도 한다. 대영제국이 사라졌고 식민지 시대도 끝났지만, 조지 오웰이 제국 경찰로 일하며 느끼고 기록한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은 생생히 남아 있다. 오웰은 자기 시대의 모순 부조리를 곱씹다 인간성을 억압하는 체제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오웰이 제국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사상이나 액션 플랜을 발표한 것은 아니었다. 오웰은 제국주의를 괴로워했고, 그의 괴로움은 문장에 담겼다. 2020년대 작가는 1920년대 제국 경찰이 본 것과 느낀 것을 생생히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인간성을 억압하는 체제는 2020년대에도 있다. 2020년대 작가는 그에 대해 괴로워해야 하지 않을까.

 짧은 소설을 모은 책 서두가 지나치게 비장해졌다. ‘저희의 목표는 독자들이 무언가를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도로 정리해본다. 그 ‘무언가’가 뭐냐, 하고 물으신다면 아주 정확하게 꼬집어서 답하기는 어렵다.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 선생님들의 인간성을 억압하고 있는, 비인간적인 무언가다. 수십 년 동안 보아왔던 것 아니냐, 하고 또 물으신다면 2020년대의 모습은 또 다르다고 대답하고 싶다. ‘저희가 본 것을 같이 봐주시고, 함께 괴로워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2024년 가을, 장강명 드림.


킬러 문항 킬러 킬러
킬러 문항 킬러 킬러
72. 신의 전쟁 (카렌 암스트롱)

“종교는 역사상 모든 주요한 전쟁의 원인이었다.” 세계적인 종교학자이자 본인 역시 한때 수녀였던 카렌 암스트롱은 택시 기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암스트롱은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바로 ‘1,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종교가 아니었다’고 받아친다.

하지만 종교가 ‘모든 주요한 전쟁’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전쟁의 원인이 된 것은 사실 아닌가? 현재도 진행 중인 국제적인 갈등과 테러의 배후에 종교가 있지 않나? 신념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은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아가 자신과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 아닐까?

오늘날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상당수 지식인들이 품고 있는 의심들일 것이다. 암스트롱은 그 질문들에 대해 최선을 다해 대응하려 마음먹고 『신의 전쟁』(교양인)을 집필한 것 같다. 수메르 시대부터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시간을 살피며 746쪽에 걸쳐 종교와 전쟁, 폭력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암스트롱이 펼치는 여러 반론 중 가장 굵직한 주장 두 가지를 꼽아보자면 이렇다. 첫째, 종교가 원인으로 알려진 충돌의 배경에는 종교 외에도 복잡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소가 있었다. 십자군 원정에서부터 최근의 자살 폭탄 테러에까지 모두 해당하는 말이다. 둘째,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에는 거대한 폭력을 유발하는 ‘종교적 열정’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민족주의가 그러하다. 암스트롱은 언급하지 않지만 강성 정치 팬덤을 이해하는 데에도 들어맞는 말이겠다.

책은 종교가 종교적 폭력에 책임이 없다고까지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이 두꺼운 저작은 종교를 위한 긴 변명에 불과한가? 어쩌면 처음부터 질문들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종교에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게 아니라 종교의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지는 대규모 폭력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종교가 가장 훌륭했을 때 수백 년 동안 해 온 일’을 해낼 방법을 이 세속의 시대에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의 전쟁 - 성스러운 폭력의 역사
신의 전쟁 - 성스러운 폭력의 역사
71. 컨버전스 (피터 왓슨)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기압이 기체 분자의 운동 결과임을 알고 감명 받은 적이 있다. 고등학생 때는 원소의 화학적 성질이 가장 바깥 전자껍질에 있는 전자에 달려 있음을 배우고 놀랐다. 이상기체 방정식과 운동에너지 공식이, 물리학과 화학이 연결되는 순간. 신기하기도 했고, 숨어 있던 깊은 질서의 존재를 깨닫는 듯해 잠시 숙연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문화사 분야에서 역작들을 써낸 논픽션 작가 피터 왓슨은 그런 발견들이 19세기 중반부터 과학사에서 빈번히 일어났으며, 현재도 활발히 진행 중이라고 주장한다. 물리학이 화학과 거의 합쳐졌고, 화학과 생물학이 만나 분자생물학을 낳았다. 이제 생물학, 심리학, 경제학이 한데 어우러지고 고고학, 유전학, 언어학이 협력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한 분야의 연구가 다른 분야 연구의 도움을 받고, 여러 학문의 연구 대상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전에 보지 못했던 큰 그림이 드러나는 지적 사건들에 뭐라 이름을 붙여야 할까. 왓슨은 에드워드 윌슨이 사용한 ‘통섭(consilience)’ 대신 ‘집합, 수렴’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컨버전스(convergence)라는 용어를 택했다.

704쪽짜리 책 『컨버전스』(책과함께)의 앞부분 3분의 2 가량은 지금까지의 통합 서사를 흥미진진하게 정리한 과학사 서적이다. 나머지 3분의 1은 이 서사가 암시하는 바를 추측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도발적인 과학철학 교양서다. 저자는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과감히 나아간다. 앞부분도 재미있지만 나는 뒷부분이 더욱 흥미로웠다.

그래서, 종국에는 모든 학문이 하나로 합쳐질까? 철학, 예술, 윤리를 과학이 설명하는 날이 올까? 물리학과 수학이 통합된다면, 우주가 곧 수학이라는 의미일까? 우리가 아는 모든 현상과 이론 뒤에는, 언뜻 무한해 보이는 다양성을 낳은 심오한 질서가 숨어 있고, 우리는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을 뿐일까? 그 원리가 바로 ‘궁극의 진리’인가? 아니면 이게 다 최근 과학의 성과에 놀란 학자들이 벌이는 호들갑일까? 여러 분야에 두루 관심 있는 지적인 독자라면 분명히 빠져들 책이다.

 


컨버전스 - 현대 과학사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지적 전환
컨버전스 - 현대 과학사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지적 전환
69, 70. 한국추리소설 걸작선 1, 2

책 좋아한다는 사람 중에 추리소설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몇몇 이유를 들어 SF나 판타지, 로맨스 장르를 읽지 않는다는 독서가는 봤지만 추리소설을 피한다는 이는 못 봤다. 애서가들의 독서 편력을 들어보면 열에 아홉은 어릴 적 읽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말한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추리소설보다 ‘범죄소설’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탐정소설, 형사소설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탐정, 형사, 혹은 ‘추리’가 나오지 않아도 훌륭한 범죄소설들이 있으니. 범인 찾기, 트릭 풀기에서 눈을 돌리면 감상의 폭이 더 넓어지는 작품도 많다. 범죄는 강렬한 드라마를 일으키며, 늘 얼마간은 사회적 요소를 품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추리소설 걸작선』 1, 2권을 읽는 일은 이중으로 즐거웠다. 수수께끼 풀이의 쾌감, 한국 추리문학의 계보와 선배 작가들의 분투를 발견하며 얻는 감흥도 물론 컸다. 동시에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한국 사회의 모습과 한국인들의 심리를 쫓아가며 읽어내는 독서도 흥미진진했다. 해외 범죄소설, 혹은 어느 작가의 단독 단행본을 읽으면서는 얻지 못했을 재미다.

전체 1,484쪽 분량인 책 두 권에 모두 44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국경 밖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신나게 펼치는 작품들도 있지만, 역시 한국의 범죄에 눈길이 간다. 김성종의 「회색의 벼랑」은 냉전 시대를, 서미애의 「반가운 살인자」는 외환위기 이후 파괴된 가정의 풍경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 여성을 소재로 한 한이의 「체류」, 갑질 문제를 다룬 송시우의 「사랑합니다, 고객님」은 진지하고 날카로운 사회비판 소설이기도 하다.

상당수 작품들이 아내의 불륜에 대한 가부장의 분노(혹은 공포)를 다룬다는 점은 흥미로운 분석 포인트가 될 수 있겠다. 그 순간의 독특하게 습하고 탁한 분위기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2012년에 나온 선집이라 네이버와 미다졸람은 나오지만 소셜미디어와 펜타닐은 아직 언급이 없다. 언젠가 3권이 나온다면 2020년대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범죄로 어떤 것이 등장할지 상상해본다. 소재가 부족하지는 않으리라.

 


[세트] 한국추리소설 걸작선 1~2 세트 - 전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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