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경제 전문 저널리스트인 빈야민 애펠바움이 쓴 『경제학자의 시대』(부키)는 1950년대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은 경제학자가 아니었고, 경제학자를 얕잡아 봤다. 경제학자들의 분석은 근거가 빈약하지만 쓸 만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기에 50명 고용했다는 식이었다. 그렇게 뽑힌 경제학자들은 지하에서 인간 계산기처럼 일했다. 연준 수뇌부에는 경제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반세기 동안 경제학은 금융과 재정을 넘어, 모든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학문이 되었다. 기업을 규제해야 하나? 실업자 수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징병제냐, 모병제냐? 사람들은 경제학자들에게 답을 물었다. 사실 경제학의 영향은 그 이상이었다. 책 중간에 나오는 한 판사의 고백처럼 경제학은 “객관성을 제공”하는 듯 보였고, 많은 이들이 그 ‘객관성’에 기반해 조직, 때로는 자기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 결과 “점점 더 삶을 설명하는 틀이 종교도 아니고 법도 아니고 경제학이 되었다.” 경제학은 이제 인간 생명의 가치도 돈으로 환산해서 다른 가치들과 비교한다.
물론 이 과정은 단선적이지 않았으며, 주류 경제학자들이 “배금주의 만세!”를 외치며 똘똘 뭉쳤던 것도 아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양심을 지닌 학자들이 오랜 시간 격론을 벌였고, 인플레이션처럼 그들의 응답을 요구하는 현실적인 난제도 있었다. 애펠바움은 752쪽에 걸쳐 이들의 일화와 논쟁을 펼쳐 보인다. 밀턴 프리드먼, 조지 스티글러, 앨런 그린스펀 등 스타 경제학자들과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등 미국 대통령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경제학의 현재 위상에 비판적인 책이지만 경제학의 공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경제학적 사고방식은 적어도 밥상 전체의 크기를 키우는데 성공했으며, 그 결과 비참한 가난이 세계 각국에서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밥상 위에 놓인 밥그릇 크기는 극적으로 불평등해졌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지식 시장’을 세우자고 제안한다. 경제학자들이 바로 그 일을 해냈던 것 아닌가.
창조적인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한다. 교육부 장관도 대기업 회장도 그렇게 말한다. 거기에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단다. 학교에서는 창조성을 키운다는 방향으로 교육제도가 수시로 바뀌고, 학원에서는 자신들의 프로그램이야말로 창조성을 쑥쑥 키워준다고 큰소리친다. 그런데 다들 창조성이 뭔지 알고는 있는 걸까? 학자들은 그게 정의하기 어렵고 어떻게 발휘되는 건지 모른다고 하던데.
다중지능 이론을 창시한 세계적인 교육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738쪽짜리 책 『열정과 기질』(북스넛)에서 창조성의 문제를 파고든다. 접근법은 단순하다. 20세기 각 분야에서 창조적인 업적을 남긴 거장 7명의 삶을 분석해 그들의 성격과 선택, 환경에서 공통점을 찾는다. 가드너가 고른 인물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T. S. 엘리엇, 마사 그레이엄, 그리고 조금 놀랍지만 마하트마 간디다.
가드너에 따르면 창조적인 거장들은 성취를 중요하게 여기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경계인으로 자라났고, 청년기에 대도시에서 동료들과 교류하며 지적 자극을 받았다. 엄격한 양심을 지녔으나 자신의 작업을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매우 무자비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자기 분야에서 첫 번째 혁신을 이루고 10년가량 뒤에 두 번째 도약에 성공하며 대가가 됐다.
그런 ‘분석 결과’를 읽어도 창조성의 본질이 뭔지, 어떻게 하면 그걸 키울 수 있는지 썩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대상을 제대로 고른 건가, 지나친 일반화 아닌가 하는 의문에 대해 긴 설명이 있지만 썩 개운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는데, 저 ‘결론’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와 사상가에 대한 100쪽짜리 평전 7편 모음집이라고 여기며 책장을 넘길 때 가장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문장은 편안하고 관찰은 예리하다. 창조성이라는 관점에서 거장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통찰을 얻는다. 간디를 창의적인 공연가로 해석하면 그의 정치적 재능과 결코 순진하지 않았던 전략이 보이는 식이다. 20세기라는 시대에 대한 분석도 무척 흥미롭다.
월가 점령 시위가 한창이던 2011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이 수업을 듣지 않겠다’며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교수의 경제학 입문 수업이었다.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은 현대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은 주류 경제학이 낳은 문제라고 봤나 보다. 주류 경제학을 배우는 일은 그런 모순에 눈감는 항복 행위라고 여겼던 듯하고.
실비아 나사르의 『사람을 위한 경제학』(반비)을 읽다가 문득 그 학생들을 떠올렸다. 가진 자들을 옹호하는 사악하고 단단한 율법이 세상을 지배하며, 거기에 입문하는 순간 자기들은 세뇌될 테니 처음부터 거부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얼마나 젊은이답게 순수하고… 어리석은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뷰티풀 마인드』의 저자이자 경제학 석사인 나사르는 19세기와 20세기 경제사상가들의 삶을 흥미진진한 연속극처럼 보여준다. 그녀가 고른 학자들은 모두 인간적인 흠결이 있지만 적어도 ‘부자 편에 서야겠다’ 따위 태도는 지니지 않았다.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무려 ‘세상을 구하겠다’는 열정과 야심이다. 이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학문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디어는 혁신적이기는 해도 늘 불완전하다. 그래서 다음 세대 사상가들로부터 논박 당한다.
816쪽에 걸쳐 책이 그리는 경제사상사는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생각 도구’가 진화하는 과정이다. 그 도구는 율법이 아니며 사악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이 책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이 마르크스다). 현재의 경제학 교과서 역시 학문적 열정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논박당하고 보완돼야 한다.
짧은 책 소개지만 이거 하나는 빠뜨리지 말아야겠다. 천재들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그런 건지, 아니면 천재들이라 자존심이 세서 그런 건지, 몇몇 인물들의 연애담이 정말 재미있다. 특히 비어트리스 포터 웨브와 조앤 로빈슨, 이 당당한 두 여성 학자의 삶은 여태까지 영화화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경제학에 관심이 없어도, 그저 인물 이야기로 읽어도 푹 빠지게 될 책이다.
마키아벨리는 40대 중반에 『군주론』을 집필했다. 공직으로 복직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던 때였고, 그래서 자기 추천서 성격이 강한 『군주론』은 이중으로 음흉한 책이 되었다. 군주는 음흉해져야 한다는 말을 음흉한 목적으로 썼으니. 삼켜내기 어려운 주장들을 담은 『군주론』은 이런 배경 덕분에 더 해석이 분분해지는 책이 됐다.
군주론을 쓰고 10여 년이 훌쩍 지나 마키아벨리는 말년의 역작 『피렌체사』를 썼다. 군주론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이었던 것 같다. 다른 역사가들이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피렌체의 내부 분열 문제는 대충 쓰거나 무시했다는 비판으로 책을 시작한다. ‘나 (이번에는) 눈치 안 보고 썼다, 그리고 내부 분열 문제에 집중했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는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무블)라는 제목으로 2022년에야 완역됐다. 번역본 기준 780쪽의 대작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군주론』보다 읽기 수월하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다급한 구직자가 아니라 냉철한 논평가다. 그가 고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원인과 영향을 분석할 때, 행간의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덜 기울여도 된다. ‘귀족과 평민 간의 심각하지만 자연스러운 적의가 공화국에 창궐하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진단도, 왜 똑같이 평민이 승리했는데 로마는 더 고결해졌고 피렌체는 반대로 비루해졌는가 하는 분석도 소화하기 전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꿰뚫어본다는 감탄이 나온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대목에서 한국의 계층 갈등 양상은 로마를 닮아 가는지, 피렌체를 향해 가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간 마키아벨리도 한층 더 가깝게 다가온다. 책이 중점적으로 다룬 13~15세기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분열상은 징글징글할 정도다. ‘훌륭한 법과 제도로 다스려지는 도시는 다른 도시들과 달리 더 이상 어느 한 사람의 미덕에 의지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도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전체적인 정부와 방종한 정부는 모두 틀림없이 단 한 사람의 미덕과 행운에 의지해 유지될 수밖에’라는 결론을 내리는 좌절한 지식인의 초상이 그려진다.
제가 기획한 <킬러 문항 킬러 킬러>와 제가 첫 번째 에피소드를 쓴 <소설, 한국을 말하다>를 한국일보에서 기획기사로 다뤄주셨습니다. 두 책 모두 테마를 정한 뒤 작가들이 종합일간지(한겨레, 문화일보)에 원고를 연재하고 이후에 책으로 엮은 방식이지요. 경쟁 매체의 작업에는 언급을 피하는 게 언론계 관행인데 이렇게 호평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의미 부여도 반갑습니다.
거친 분석이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문단문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사회 문제를 소설화하는 시도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젠더나 퀴어 이슈 등에 작가의 당사자성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것, SF 기법을 활용해 일종의 우화 소설을 만드는 것, 혹은 근현대사의 서사를 활용하는 것.
물론 그런 작품들도 의의가 있지만 저는 보다 차분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당대 문제를 사실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에 갈증이 있습니다. 그런 작품이 지금 부족하다고 느껴요. ‘정통 사회파 소설’이라고 불러도 좋겠지요. 그래서 비슷한 갈증을 느끼는 작가님들과 월급사실주의 동인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기술의 충격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의식이 있고, STS SF 미니픽션을 조선일보에 연재 중입니다. STS SF도 내년 초에 뜻을 함께 하는 한중일 작가님들과 작품집을 내려 합니다. 작가님들은 다 모았네요.
특히 지금 한국문학에 부족한 게 발품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래 했습니다. 그 생각이 이어진 새로운 기획연재를 며칠 뒤에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네요. 월급사실주의 작가님들과 모 종합일간지에 함께 글을 싣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꾸벅...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11517010001105?did=NA
기술이 발전하면 사람들의 삶이 정말 나아지는 걸까? 몇 년 전부터 진지하게 고민하는 주제다. 페니실린에는 감사하지만 인스타그램에 대해서는 별로 그렇지 않다. 그런 문제의식을 담아 지난해 SF 소설집을 냈는데 작가의 말에서 간단한 삼단논법으로 딴에는 과감한 주장을 펼쳤다: ‘기술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술을 통제해야 한다.’
앞으로도 같은 문제의식으로 SF와 논픽션을 더 쓰려 하는데, 그때마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생각의힘)를 자주 펼치게 될 것 같다. 기술과 번영의 관계를 깊이 성찰한 이 736쪽짜리 책의 첫째 장 제목이 ‘테크놀로지에 대한 통제’다. 두 MIT 경제학자들은 기술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 발전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술의 발전 방향은 공공선을 향할 수도 있고, 그 기술을 개발하거나 소유한 특정 계층의 이익을 향할 수도 있다. 산업혁명 초기 생산성 향상은 공장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이 아니라 몇몇 공장주들의 수익을 증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책은 그 외에도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따라서 기술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의제를 설정하고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중요한데, 저자들은 이를 ‘설득 권력’이라고 칭한다. 오늘날 기업계와 ‘테크 지배층’이라 불러야 할 소수가 이 설득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게 저자들의 진단이다. 테크 업계의 억만장자들은 기술 진보가 현재의 여러 가지 위기를 다 해결해줄 거라는 비전을 당당하게 내세우지만, 실제 그들이 개발하는 기술은 자동화, 감시, 데이터 수집, 광고 쪽으로 치우쳐 있다. 특히 인공지능을 비롯한 몇몇 첨단 기술들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듯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들의 해법이 다소 막연하게 들리기는 하다. 그 막연함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첫째, 너무나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기에 추상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둘째, 여태까지 구체적인 방법이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다. 이제부터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할 문제라는 얘기다.
잡학사전 유의 책들을 좋아해서 종종 읽는 편이다. 그렇게 사이먼 반즈의 『100가지 동물로 읽는 세계사』(현대지성)를 집어들 때에는 이 책도 역사에 등장한 동물들에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 모음집이겠거니 했다. 미국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먹게 된 사연이라든가, 누에나방과 전근대 비단 산업의 성장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728쪽짜리 이 두툼한 하드커버 서적은 그런 일화들을 담은 재미있는 읽을거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한데 그 이상의 깊이도 듬뿍 담겨 있었고, 나는 책장을 넘기며 ‘역사에 등장한 동물들’이라는 생각 자체를 반성하게 되었다. 역사를 오직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것으로, 동물들은 거기에 가끔 식재료나 산업의 도구로 등장한다고 여겼던 거다. 큰 착각이었다.
베테랑 저널리스트이자 환경운동가인 저자가 말하는 ‘세계사’는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다. 이 세계사에서 동물은 당당한 주역이고, 때로는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지구의 모습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지렁이는 300만 년 전부터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다른 육지 동식물들이 자랄 수 있었다. 책에 따르면 ‘우리가 먹는 음식의 약 90퍼센트는 지렁이의 도움으로 얻은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해산물과 수경 재배작물 정도다.’
그럼에도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초점을 맞추는, 목차에 없는 101번째 동물은 역시 인간이다. 갑자기 큰 힘을 얻는 바람에 오만하고 무책임해진 종, 이제는 지렁이 이상으로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종이다. 책에는 인간이 멸종시킨 동물과 인간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빠진 동물들이 숱하게 나온다.
다행히 인간은 지렁이와 달리 자신의 영향력을 자각한다. 마지막 도도새를 죽일 때까지만 해도 인간은 어떤 동물이 멸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하지만 도도새와 마찬가지로 모리셔스 고유종인 분홍비둘기는 멸종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분홍비둘기의 서식지를 파괴한 것도, 그들의 멸종을 막은 것도 인간이었다. 기회는 아직 있다.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균형 잡힌 시선이 신뢰감을 준다.
2016년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영국에서는 국민투표 결과 유럽연합을 탈퇴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는 온건 좌파 정당들이 몰락하고 극우 정당들이 세를 불렸다. 선진국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진단이 잇따랐다.
경제사학자 애덤 투즈는 이런 현상들의 근본 원인으로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꼽는다.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저작 『붕괴』(아카넷)에서 그는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과 결과를 자세히 분석하는데, 특히 내가 관심을 갖고 읽은 부분은 그 정치적 여파다.
번역본으로 964쪽에 이르는 만만치 않은 이 책에서 미국 정치에 대한 부분만 거칠게 옮겨 본다. 2007년 위기를 맞은 미국 금융당국의 대응은 “월스트리트를 먼저 살리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금융시스템’을 보호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수많은 실업자들을 보호하지는 못했다. 2009년 이후 경제회복의 혜택은 극소수에게만 돌아갔고, 모두가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품게 됐다. 시위대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2016년 미국 대선을 결정한 힘은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분노였다.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에 긍정적이라고 대답한 미국 청년층이 크게 늘었다. 민주당 주자로 주목을 받은 버니 샌더스는 월스트리트의 적이라는 점에서는 트럼프와 같았다. 정책 공약이 허황되다는 비판을 받으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면 연준이 미친 듯이 은행에 자금을 퍼주고 미래의 납세자에게 부담을 떠넘긴 것은 정상적인 정책이었나?”
2019년에 발간된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현재 서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포퓰리즘이라고 분석하면서, 한국은 이 책 후반부에 나오는 정치적 대격변을 겪지 않고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한 덕분에 성장과 변화를 이뤘다고 찬사를 보낸다. 립서비스였을까, 아니면 너무 섣부른 진단이었을까. 경제적 불평등이 불러온 좌절과 계급 갈등, 포퓰리즘 득세와 정치의 공백은 고스란히 지금 한국의 모습이지 않은가.
‘장강명의 벽돌책’ 연재 초반에 영국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글항아리)를 다루며 고대 로마와 중국의 한나라를 비교 설명하는 대목이 재미있다고 썼다. 오늘 소개하려는 어우양잉즈의 『용과 독수리의 제국』(살림)은 920페이지에 걸쳐 두 제국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더 깊고 자세하게 살피는 책이다. 어우양잉즈는 진시황이 세운 진(秦)나라를 한나라만큼이나 중요하게 보기에 정확히 말하면 비교 대상은 고대 로마와 중국의 진․한 왕조다.
한 범주 안에 있는 두 대상을 세밀히 비교하면서 우리는 그들이 속한 카테고리 자체에 대해서도, 두 대상의 개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각도에서 통찰을 얻는다. 먼저 로마와 진․한의 공통점을 읽을 때에는 여기에 거대 제국의 흥망에 대한 일반 법칙이 숨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이웃을 무력으로 정벌하되 그 문화에 대해서는 열린 자세여야 한다든가, 확장 과정에서는 점령지에 주둔군을 두는 대신 패권을 쥐는 편이 낫다든가, 정치 엘리트 계층을 포섭해야 한다든가, 도로 건설이 중요하다든가.
그런데 이 책에서 진짜 흥미진진한 부분은 로마와 진․한의 차이점들이다. 예를 들어 이런 분석은 어떤가. 고대 중국은 노예가 있는 사회였지만 노예에 기반을 둔 경제는 아니었다. 반면 로마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노예제 사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예제 사회에서 ‘자유’라는 개념과 자유민의 권리가 더 심도 있게 논의되고 발전한다. 고대 중국에는 자유민과 노예라는 대립항이 없었고, 대신 양민과 천민이라는 개념만 있었다. 이런 차이는 동서양의 문화와 전통적 사고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책 내용만큼이나 저자의 이력도 흥미롭다. 어우양잉즈는 중국계 미국인 여성으로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물리학 교수로 일하다 퇴임한 뒤 역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과학자 출신답게 논증이 꼼꼼하며, 중국 역사와 문화에 해박하면서도 ‘중화’를 찬양하거나 거기에 자부심을 드러내는 기색은 전혀 없다. 시종일관 유가와 한나라를 비판하고 법가와 진나라를 높이 평가하는 관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