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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인생책 함께 읽기 2

‘소설가의 인생책’ 함께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해요.


지난 '소설가의 인생책 1'에 이어 5명의 소설가의 인생책 함께 읽기 두 번째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소설가이면서 든든한 소설 독자인 다섯 분과 손을 맞잡고 그들의 인생책을 함께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해 보면 어떨까요? 이번에 함께해 주실 소설가는 김미월, 김혜나, 김의경, 우다영, 김지연 작가입니다.

 

지난 모임에 참여한 분들 후기 가운데 ‘29일 동안 책 한 권을 천천히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다 보니 미처 몰랐던 감정도 알게 되었다’는 말이 인상 깊게 남습니다. 함께 읽기에 더욱 든든한 소설가와의 밀도 높은 대화에 참여해 보세요.

 


소설가와 ‘함께 읽기’ 란!


-책은 각자 준비합니다.

-모임지기인 소설가가 이끄는 방식에 따라 29일 동안 책을 함께 읽습니다.

-소설가가 던지는 책에 관한 질문에 답해봅니다.

-그날 읽은 분량에 대한 소감을 남기거나, 다른 참여자들의 단상을 읽고 내 생각을 보탭니다.

-책 한 권을 완독하는 동시에 책에 관해 깊고, 맥락 있는 대화를 서로 나눕니다.

 


신청 기간: 12/01~12/10 (아래 인생책 함께 읽기 링크 클릭하셔서 ‘참여 신청’ 하세요.)

모임 기간: 12/11~01/08 (모임은 29일간 열립니다. 참여 신청을 하시면 그믐의 알림과 개인 이메일로 모임 진행 상황을 안내해 드립니다.)


김미월 소설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네잎클로버를 백 개 이상 찾았다는 사실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도 늘 운이 좋다.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함께 읽기


 

김혜나 소설가

2010년 장편소설 『제리』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제리』 『정크』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소설집 『청귤』 『깊은숨』 등이 있다.

엔도 슈사쿠, <깊은 강> 함께 읽기


 

김의경 소설가

장편소설 『청춘 파산』『콜센터』, 소설집 『쇼룸』이 있다.

루시아 벌린, <청소부 매뉴얼> 함께 읽기


 

우다영 소설가

최근에 친구들로부터 하얀 모래시계를 선물 받았는데요. 모래는 뒤집힌 삼각원뿔에서 새어나와 작은 아몬드 모양 공간에 잠시 고였다가 이내 맨 아래 삼각원뿔 속으로 남김없이 떨어집니다. 그러는데 30분이 걸리고, 그것을 뒤집으면 다시 30분의 시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 어떤 곳에 고일까요?

줌파 라히리, <저지대> 함께 읽기

 


김지연 소설가

2018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빨간 모자』,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가 있다. 제12회, 제1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함께 읽기 

 


기획의 말_허희 평론가

뭉텅이로서의 세계와 감정. 이를 거부하는 사람이 소설 독자다. 그는 개별적인 세계와 단독적인 감정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단지 믿음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소설 독자는 작품을 읽고, 이에 대하여 말하거나 쓴다. 그리하여 그는 뭉텅이로서의 세계와 감정에 조금씩 다성적인 균열을 낸다. 혼자보다 함께 라면 좋으리라. 가령 소설가이기도 한 든든한 소설 독자와 손을 맞잡으면 어떨까. 지식공동체 그믐은 ‘소설가의 인생책 1’에서 그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고, ‘소설가의 인생책 2’를 통해 씨앗을 심으려 한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그 싹이 자랄 것이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는 그믐의 홍보활동을 위한 콘텐츠 제작에 활용될 수 있습니다.

*참여 관련 궁금한 사항은 gmeum@gmeum.com으로 문의 주세요.

20. 수퍼 스윙 라거와 드뷔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하루였다. 새벽에도 잠이 오지 않아 한참 깨어 있었다.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래도 새벽 6시 반에 일어났고, 바닥을 청소했고, 전화 영어 수업을 받았고, 기타를 연습했고, 근력 운동을 했다. 하강 나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런 일들을 했다. 그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줘도 될 것 같다.

쓰고 있는 소설에서는 주인공 형사가 수상한 참고인을 만나러 지방에 내려갔다. 참고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형사와의 만남을 피한다. 형사는 이 사내를 꼭 만나야 하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이 막혔다. 이런 때 진짜 형사라면 어떻게 하려나.

여태까지 쓴 원고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1700매가 넘었다. 요즘 기준으로는 단행본 두 권이 충분히 나올 양이다. 앞으로 써야 할 분량도 300매는 넘을 것 같다. 완성 원고가 2000매를 넘지 않는다면 출판사에 두툼한 한 권으로 내자고 요구해볼 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분권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온갖 사변으로 가득한 두 권짜리 장편소설을 요즘 세상에 선뜻 집어 들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이게 팔릴 책인가. 쓸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오전에는 또 일본 추리소설을 한 권 읽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안녕, 드뷔시』다. 피아니스트 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라니, 책장을 펼칠 때에는 진지하게 들리지 않았는데 푹 빠져 읽었다.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는 웰메이드 추리소설이기도 했고, 음악소설이자 인간 드라마이기도 했다. 주인공이 겪는 고난이 가슴 아팠고 그녀의 노력이 감동적이기도 했다. 나도 저렇게 노력해야 하는데.

HJ도 요사이 몹시 우울해한다. 그 우울감의 원인 상당 부분은 나 때문이어서 많이 미안하다. 우울증은 마치 전염병처럼 곁에 있는 사람까지 우울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그녀는 회사에서도 쉽지 않은 상황에 있었고, 부동산 투자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 때문에도 괴로워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힘든가? 나도 HJ도 궁금해 했다. 이 우울감은 우리가 중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인가?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있거나 종교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니면 여기에 보다 근본적인 외부 요인이 있을까?

한국 사회, 더 나아가 세계 전체가 지금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불행해지는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보람이 있는 일자리를 찾기는 더 어렵고, 노동으로 부자가 될 가능성도 희박해지는 세상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HJ는 요즘 경제 공부를 열심히 한다. 기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도 경제와 투자 관련 서적들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이 과연 정상인지, 지금이라도 영혼까지 끌어 모아 뛰어들어야 하는 건지, 이러다 버블이 터져서 장기 불황이 오는 건 아닌지 속 시원히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다.

낮에는 마트에서 사 온 닭다리를 혼자 먹었고 저녁에는 남은 닭다리와 가래떡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수퍼 스윙 라거, 칼스버그 대니쉬 필스너, 1866 블론드를 마셨다. 만사 심드렁하던 차에 아무 생각 없이 수퍼 스윙 라거를 한 모금 넘겼는데,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맛있었다. 어, 이거 뭐야……. 덕분에 가라앉아 있던 기분도 조금 올라왔다.

수퍼 스윙 라거는 일산에 있는 한국 수제맥주 회사인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의 제품이다. 라거지만 알코올 도수를 높이고 홉 풍미를 강조해 인디아 페일 라거라고 부른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미국에서 탄생한 신생 장르다. 전에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의 제품들을 몇 종류 마시고 별 인상을 받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다음날에는 HJ가 재택근무를 했다. 나는 평소 사용하던 책상에서 작업하지 않고 HJ와 함께 식탁에 앉아 글을 썼다. 노트북으로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것 같아 기분 전환 삼아 공책을 꺼내 거기에 볼펜으로 썼다.

각자 일을 하면서 가끔 잡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그러다 내가 현재 구상 중인 논픽션 두 편 중 한 편의 내용에 대해 HJ에게 설명했다. 한국 독자가 아니라 해외 독자들을 겨냥한 논픽션이었는데, 무모하다면 퍽 무모한 프로젝트였다. 크게 성공할 수도 있지만 끝내 해외에 소개되지 않고 국내에서 몇 부 팔리고 말 수도 있다.

HJ는 그 구상을 듣고 약간 감탄한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나는 다른 논픽션 구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더 황당하고 더 도박 같은 도전이었다.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전과는 차원이 다른 작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HJ는 이 단행본의 주제는 더 높이 평가했다.

“난 전부터 자기가 이상한 생각들을 하는 모습이 좋았어. 엄청나게 크고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고 그걸 추진하려는 태도가 멋있어 보였어. 요즘은 그런 생각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HJ가 말했다.

“우울증으로 고생할 때도 계속 이런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그리고 이 구상들 다 안 풀릴 수도 있어. 모 아니면 도야.”

“알아. 그래도 멋있어.”

이날 저녁에는 헬스장에 가서 달리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수퍼 스윙 라거를 네 캔 사 왔다. 수퍼 스윙 라거도 냉장고에 늘 몇 캔 두면 좋겠다 싶었는데 밤에 혼자서 그 네 캔을 다 마셨다. HJ는 옆에서 버드와이저와 호가든을 마셨다.

안주로는 아구포와 납작만두를 먹었다. 처음 먹어 본 아구포는 쥐포와 거의 비슷한 맛이었는데 좀 더 살집이 있었다. 내가 꾸는 꿈을 이해하고, 그런 꿈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여인과 함께 살고 있다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생각했다.

 

스윙 스윙 스윙

인생의 작은 기쁨들을 되찾겠어

큰 꿈도 놓지 않겠어


276. 극한 갈등 (아만다 리플리)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무겁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통찰에 현장감 넘치는 르포와 인터뷰를 붙여 아주 술술 읽히게 썼다. 책의 통찰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극한 갈등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두 번째는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이다. 보다 작고 사적인 갈등 상황을 다루는 데에도 유용할 것 같다.

극한 갈등
극한 갈등
275. 트레이더 콜린 씨의 일일 (콜린 랭커스터)

무척 재미있는 책이고 또 귀한 책이기도 하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투기자본을 굴리는 이들의 집과 사무실, 머릿속을 구경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무엇을 기회라고 보는지, 어디에 투자하는지, 어떤 술을 어디서 마시는지, 평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깔보는지 혹은 동정하는지. 그런데 그런 매크로 트레이더들조차 ‘지금의 금융시장은 완전히 미쳤다, 곧 붕괴가 온다’고 두려워한다. 자본시장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정신문화 영역에서까지 몰락의 징후를 본다고 한다.


트레이더 콜린 씨의 일일
트레이더 콜린 씨의 일일
274. 나이듦에 관하여 (루이즈 애런슨)

노인의학의 필요성과 현 주소에서부터 시작해 병원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어떻게 더 노인친화적으로 만들 것인지 이야기한다. 좋은 질문과 고민거리를 무수히 던지는 책.


나이듦에 관하여
나이듦에 관하여
273. 피드 (매튜 토빈 앤더슨)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였다는 청소년 SF. 간결한 문장과 경제적인 묘사가 속도감을 주지만 무성의한 느낌도 든다. 그래도 기본 아이디어가 좋고, 결말은 감정선을 건드린다.


피드(FEED)
피드(FEED)
272. 트러스트 (프랜시스 후쿠야마)

한 챕터에 걸쳐 한국의 대기업 모델을 분석하는데, 출간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일본식 재벌관계망을 둔 중국식 가족기업. ‘역사의 종언’은 막판에 짧게 언급만 한다.


트러스트
트러스트
271. 국가는 회사가 아니다 (폴 크루그먼)

전자책으로 읽다가 길이가 너무 짧아서 놀람. 국제무역이라든가 폐쇄형 시스템에서의 의사결정과 같은 주제들을 담백하고 간결하게 다룬다.


국가는 회사가 아니다(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클래식 1)
국가는 회사가 아니다(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클래식 1)
19.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와 도서관 탐방

HJ와 함께 이웃 동네의 구립도서관에 갔다. 걸어서 편도 4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우리는 그 구(區)에 살지도 않는다. 집에서 그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서관이 두 곳 있는데도 이곳에 가보기로 한 이유는, 가는 길이 무척 편하고 주변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도상으로는 그래 보였다.

공원 안에 있는 보행 전용로를 따라 자동차 걱정 없이 나무와 개천을 바라보며 갈 수 있다. 3킬로미터 가까이 걸어야 하지만 집에서 도서관까지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는 두 번만 지나면 된다.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도 좋다. 주변에 분위기 좋은 카페와 식당도 많다.

여기를 우리가 주로 이용하는 도서관으로 삼을까? HJ가 제안했고 가는 길이 정말 괜찮을지, 왕복 한 시간 반을 산책하는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을지 직접 가보면서 알아보기로 했다. 마침 날씨가 포근한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헬스장에 가서 달리기를 하고 돌아온 뒤 곧장 집을 나섰다. 책을 빌리게 될지 아닐지 몰랐지만 일단 가방은 챙겼다. 점심은 걷다가 내키는 곳에서 먹기로 했다. HJ는 우리가 가려는 구립도서관 주변에 유명한 우동 소바 전문점과 청국장 가게가 있다고 했다.

공기는 온화함을 넘어서 약간 덥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점퍼를 벗어서 가방과 등 사이에 끼워 넣었다. 설렁설렁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웬 동상이 하나 나왔다. 18세기 유럽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가 책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칸트라고 적혀 있었다. 양 옆에 칸트의 명언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금속판도 있었다.

그 중 하나에 적힌 문구는 이랬다.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HJ는 그 말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행복해지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건강과 돈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칸트가 정말 저런 말을 했을까? HJ도 나도 고개를 갸웃했다. 『순수이성비판』이나 『실천이성비판』 중간에 들어가 있기에는 꽤 뜬금없는 말 아닌가?

“일을 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희망을 가져도 치질이 너무 심하면 행복할 수 없다고” 같은 말을 하며 설렁설렁 걷는 사이 도서관에 도착했다. ‘어라, 벌써?’ 하는 정도의 거리감이었다. 도서관 앞마당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날이 풀리면 거기서 차나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건물 정문에는 우주선 도킹 시스템마냥 한 사람씩 들어가 체온을 측정하고 온 몸에 소독약을 뿌려야 하는 작은 밀폐 구역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 도서관 현관에 들어서면 책상이 있고 거기서 개인정보를 담은 QR 코드를 찍거나 사는 동네와 전화번호를 적어야 했다. 책상 너머에 사서가 한 사람 앉아 있었다.

나부터 밀폐 구역을 통과해 로비에 들어섰는데 자리에 앉아 있던 사서가 나를 보자마자 “혹시 장강명 작가님 아니세요?” 하고 물었다. 내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비니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어떻게 눈만 보고 사람을 알아볼 수 있지 하고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놀라긴 했지만 그렇게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사서가 도서관을 안내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사양하고 HJ와 둘이서 건물을 구경했다. 유능한 건축가가 신경 써서 지은 건물 같았다. 구조가 독특했고,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열람실이나 카페, 야외 테라스가 정말 근사했다. 2, 3층 바깥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HJ가 좋아하는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개방감이 뛰어났다. 어린이 책들이 있는 서가에는 아이들이 신을 벗고 들어가 뛰어놀 수 있는 메자닌 구역도 있었다.

“태어나서 가 본 도서관 중에 제일 예뻐” 하고 HJ가 말했고 나도 동감이었다. 강연을 하느라 전국 여러 도서관을 다녔지만 이곳이 최고였다. 장서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서가가 널찍하고 재미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책장 곳곳에 도서를 검색할 수 있는 터치스크린이 걸려 있었다.

모든 곳이 너무 깨끗하고 새 것 느낌이 났다. “이 도서관은 새로 지은 거야?” 내가 묻자 HJ는 “아닐 텐데, 지금 우리가 사는 집으로 이사 왔을 때에도 분명히 이 건물이 있었거든”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중에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이 도서관은 우리가 이 동네로 이사 온 바로 그 달에 문을 열었다. 개관한 지 이제 겨우 15개월째였다.

도서관에서는 책을 세 권 빌렸다. HJ는 미국 주식 투자에 대한 책을 빌렸다. 그녀는 “소설가의 아내가 빌리는 책이 주식 투자 서적”이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소설가인 내가 빌린 책 중 한 권은 모든 페이지마다 그림과 말풍선이 있는 어린이용 콩트집이었다. 제목은 『5초 후 의외의 결말 1』이었다.

유명하다는 소바 전문점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도서관 옆의 커피점에 들어가 앉아 쉬면서 그 책들을 읽었다. 이곳 역시 벽 전체가 HJ가 좋아하는 통유리였다. 내부 인테리어나 나오는 음악도 고급스러웠고 커피 맛도 수준급이었다.

옆 자리 손님이 데려 온 개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계속해서 곁눈질을 했다. 심지어 밖에서 지나가던 행인들조차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카페 안의 개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주인은 친절하게 개에게 인사를 시켰다. 개는 그런 일에 무관심해 보였지만.

한 시간 남짓 커피를 마시며 『5초 후 의외의 결말 1』을 다 읽었다. 재미있었고 은근히 시니컬했다. HJ도 주식 투자 서적을 다 읽었다고 했다. 도서관에 가서 그 두 권을 바로 반납했다. 도서관 정문 옆에 수시로 책을 반납할 수 있는 무인 반납기가 설치돼 있었는데, 그런 설계도 마음에 들었다.

소바 전문점 앞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브레이크 타임이었는데도.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가게인 걸까? 조금 떨어진 청국장 가게에 찾아갔는데, 토요일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길가에 양과 대창이 전문이라는 고깃집 간판을 보고 들어가 양밥 2인분을 주문했다. 맛은 그저 그랬다.

집에 돌아와서 HJ는 샌드위치와 스콘을 먹었고, 나는 냉동만두를 네 점 전자레인지로 데워서 먹었다. HJ가 공포 영화를 한 편 같이 보자고 했다. 주변 사람 여럿에게서 추천을 받았는데, 혼자 보기 무섭다면서. 나는 제목을 처음 듣는 영화였다.

빔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영화를 틀었다. 줄거리를 전혀 모르고 봤는데 의외로 불쾌한 고어 장면도 없고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지도 않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준수한 작품이었다. 그래도 HJ는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한번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일요일 낮에는 HJ와 세 시간 가까이 인터넷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전세 가격도 1년 새 미친 듯이 올랐다. HJ의 회사와 가까운 주거지를 찾다가 오게 된 동네인데, 이제 주변 아파트 중에 우리가 전세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은 거의 없다. 임대차보호법 덕분에 올해 말 재계약은 넘긴다 하더라도 2년 뒤에는 어찌될지 모른다. 그때까지 서울 아파트 가격이 이 수준으로 오른다면 쫓겨나든지, 월세를 살아야 한다.

서울 각 지역 아파트 매매가와 전세가를 비교해 보기도 하고, 우리 동네의 괜찮은 오피스텔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뾰족한 해결책은 안 나왔다. 사실 HJ가 최근 몇 달간 혼자 몇 번이나 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포나 신도림에 살 때 대출을 받아 집을 구매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게 뼈저리게 후회된다고 했다.

“이제 노동으로 부자가 되기는 틀린 시대인 거 같아.”

HJ가 말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게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에도 분명히 심오한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했다. 저녁에 그녀는 친정에 갔다. 다음날 오전에 반차를 내고 장모님과 함께 친정에서 쓰는 청소기를 수리점에 맡기러 간다고 했다.

차도 없고 아이도 없고 수입도 건강한 우리가 이 모양인데 요즘 청년들은 얼마나 좌절감이 심할까. 그래서 비트코인을 사나. 그런 이야기를 하며 HJ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었다. 15년 전에 우리가 얼마나 궁핍했던가, 그때는 여차하면 고시원에서 살 각오도 했는데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하잖나, 그런 얘기도 했다.

지하철역에서 HJ를 보낸 뒤 나는 헬스장으로 갔다. 저녁 풍경을 즐기고 싶어 일부러 길을 돌아 공원을 통과해서 갔다. 전셋값 상승분을 마련하지 못하면 멀어질지도 모르는 풍경이었다. 그때는 예쁜 구립도서관과도 멀어지겠지. ‘집과 직장의 거리가 가까워야 한다’든가 ‘주택 임대료를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도 행복의 조건에 포함돼야 할 것 같은데.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블루스를 들으며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를 마셨다. 안주 없이 마셨다. 버드와이저의 모태라고도 하고, 버드와이저와 상표권 분쟁으로도 유명한 체코의 필스너 맥주다. 회사가 있는 체코의 소도시 이름이 체스케부데요비체인데, 부데요비체를 독일어로 하면 부드바이스, 이를 영어로 읽으면 버드와이저가 된다.

맛이 과연 얼마나 다른가 문득 궁금해져서 버드와이저도 한 캔 땄다.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눈 감고 마셔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드와이저는 구수한 맛이 났다.

 

체스케부데요비체

가 보지도 않았는데 좋아하는 동네

거기도 집값 비싸려나

 

270. 어디서 살 것인가 (유현준)

건축가에게는 도시가 커다란 책과 같겠구나 싶다. 한국 학교 디자인, 초고층 빌딩, 상가 교회에 대한 분석도 신선하고, 서울숲과 로데오거리를 잇는 보행교는 진심으로 생기면 좋겠다. 11장 ‘포켓몬고와 도시의 미래’에 나온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도 흥미로웠다. ‘건축 리모델링은 재즈와 같다’는 문장에 밑줄.


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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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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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생활자 황보름 작가님과 함께 읽으실래요?
<계급 천장> 함께 읽으실래요?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함께 읽으실래요? <빌리 서머스> 함께 읽으실래요?
🎯"우리 골목을 광장으로 만드는 법" 떠오르는 책을 추천해주세요!
[성북구립도서관] 2024년 성북구 비문학 한 책을 추천해주세요. (~5/12)
차무진의 매력은 끝이 없어라~
[박소해의 장르살롱] 14. 차무진의 네 가지 얼굴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차무진 작가와 <어떤, 클래식>을 읽어 보아요. 차무진 작가와 귀주대첩을 다룬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을 함께 읽어요<한국 소설이 좋아서 2> 차무진 소설가와의 온라인 대화
이 계절 그리고 지난 계절에 주목할 만한 장편소설 with 6인의 평론가들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1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세 번째 계절 #1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세 번째 계절 #2
직장인이세요? 길 잃은 직장인을 위한 책들 여기 있어요.
[김영사/책증정] 천만 직장인의 멘토 신수정의 <커넥팅> 함께 읽어요![김영사/책증정]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편집자와 함께 읽기[직장인토크] 완생 향해 가는 직장인분들 우리 미생 얘기해요! | 우수참여자 미생 대본집🎈[생각의힘] 어렵지 않아요! 마케터와 함께 읽기 《커리어 그리고 가정》
어서 오세요. 연극 보고 이야기하는 모임은 처음이시죠?
[그믐연뮤클럽의 서막 & 도박사 번외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그믐밤] 10. 도박사 3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수북강녕
💌 여러분의 마지막 편지는 언제인가요?
[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그믐밤] 6. 편지 읽고, 편지 쓰는 밤 @무슨서점[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가는군요](안온북스, 2022) 읽기 모임
🍵 따스한 녹차처럼 깊이 있는 독후감
종의 기원(동서문화사)브로카의 뇌도킨스, 내 인생의 책들코스믹 컨넥션
[오늘은 그믐밤] 저녁 8시 29분에 만나요
[그믐밤] 22. 가족의 달 5월, 가족에 관한 책 얘기해요.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 봄, 시집 한 권 🌿🌷
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1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9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8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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