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밀도가 증가한 인류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더 복잡한 방식을 고안해야 했는데 사회적 성별 추세도 강화되며 성인남성 중심의 권력으로 편제됨으로 성별에 따른 이중 기준이 자리 잡음을 보여주네요. 이렇게 남여의 이중 기준에 차별받는 여성의 모습이 안타깝고 화가 나게 만드네요. 하지만 BCE195년 로마의 오피아법 반대하는 여성의 저항에 통쾌함이 느껴지네요. 이런 여성의 저항이 누적되어 또 다른 사회의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과거의 여성의 저항이 오늘날의 변화를 이끌어 왔을 거란 생각이 드 네요.
농경 문명 시대 아프로, 유라시아의 노골적인 성차별에 한방 먹이는 사건이 BCE 195년 로마에서 터졌다. 오피아법(여성이 금, 은 장신구 착용이나 값비싼 옷 입는 것, 공개 장소엥서 전차, 가마 타는 것 금지하는 법)을 유지하려 하는 원로원에 엘리트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였다. ... 상류층 여성들은 이 법을 유지하려는 시도에 맞서 사살상 방역을 일으켰다. ... 여성들이 공공장소에 모였다는 사실에 분개한 대카토 등 보수적이 원로원 의원들은 이 문제는 남성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법은 폐지되었고 여성들은 승리를 축하했다! 367쪽
사람들은 간간히 커다란 무엇인가에 우리(혹은 나)를 소속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똑같으니 차이를 만들지 말자고 한다. 허나 러시아(혹은 중국)가 우크라이나(혹은 홍콩, 타이완)를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내심 한편으로 그들을 자신들의 잠재적인 적 혹은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것처럼 모두가 같다는 주장은 사실 어떠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매몰시키고자하는 목적의 프로파간다일뿐, 모두를 균일하게 여기겠다는 포용적인 태도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베타적인 무엇인가를 만들기위한 선언의 전초단계에 가깝다.
오해하지는 말자.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제 본 주제인 독서로 넘어가자. 자,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여러분들의 취미는 대부분 독서일 것이다. (독서가 아니라 문학 관련 팬덤일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이 쓴 책 좋아하시죠?)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책을 동일하게 좋아할 수 있겠는가? 문학과 비문학은 물론이고 전문적인 학술 책, 대중교양을 위한 입문 책, 소수 마니아를 위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분야나 작가의) 전집을 읽을 수 있겠는가?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취미로서의 독서는 필연적으로 중심 분야나 소재를 가지며 그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가지는 것이 유익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독서가 유익해야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비문학/역사/독일사/독일 중세사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물론 문학이라면 특정 작가/시대/국가 정도로만 나누어도 충분하다. 물론 어쩌면 "저는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다 읽어요. 저는 책을 좋아하니까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비블리오필리아(Bibliophilia ; 애서가)가 아니라 비블리오마니아(Bibliomania ; (강박장애적인) 서적수집광)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라면 전화번호부를 가져다주어도 기쁘게 읽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취미가 독서'라고 말하는 사람들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를 읽음으로서 지적인 혹은 감정적인 기쁨을 얻기 위함에 국한된다. 그 안에는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학술에 대한 책을 읽는 사람과 장르문학에 대한 책을 찾는 사람과 시사나 특정 인물의 신간을 구매하는(정치인이라면 안 읽을 가능성도 높다. 그 정치인이 썼는지도 의심스럽다.) 사람의 사고와 목적이 같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백번 양보해 고전러시아문학으로 억지로 타협을 본다고쳐도 필경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나보코프도 러시아 작가로 쳐야한다는 사람이 끼여들 가능성도 있다.
다시 한번 말하컨데 오해하지말았으면 좋겠다. 첫번째에서 민족, 열등성 운운한 것은 어디까지나 분량을 채울 목적으로 아무거나 집어넣은 것일뿐 사실 본문과는 별 연관성도 없다. 사실 현실생활에서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우리는 모두 독서라고 답하지,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분야나 작가의 이름을 대지는 않는다. (댄다고쳐도 최소한 현대 한국 작가를 불특정 개인에게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닌 것 같다.) 다만 말하고싶은 것은 편리하게 대답하기 위한 목적으로 두루뭉실하게 만들어낸 현상에 스스로까지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필자는 누구든지 책을 본격적으로 끼어들었거나 어느 순간 독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씩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그 이유를 멀리하거나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가끔씩 샛길로 틀어서 등산을 중단하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이런 여유가 산행을 더욱 안전하게 해주고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단지보(邯鄲之步)의 고사처럼 그 샛길에만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원래의 목적을 망실함은 물론이고 새로 개척하려는 분야에서마저도 길을 잃게 되어 산 속 어딘가를 해매게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말하고 싶다. 무궁한 독서의 세계에 뛰어들게 만들어준 중요한 존재를 생각하고 그 마음을 꾸준히 갈고 닦는다면 당신의 독서는 분명 더 윤택해질 것이라고. 이것이 이 난잡한 글이 하고픈 소략한 결론이다.
국내 저자가 쓴 '난독의 시대'와 같이 읽고 있습니다. 전자책, 종이책, 오디오북을 비교할 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독서의 총량이 줄어드는 시대에 살고 있네요. 구텐베르크 이후 책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의 인류는 책을 안 읽고 살았으니까 독서라는 행위 자체를 너무 당연하게 여길 필요도 없을 거 같단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제게 이 책이 있기는 한데,
벌써 몇 해 전에 야심차게;; 사둔 책이라 빛이 좀 바랬을 정도인데, 펼쳐보면 preface 이후 prologue도 안 끝낸 상태지만 지금 읽는 big history 감상에 엄청 언급되니 봐야하는지?
느무 어려운 책은 당 떨어져 있을 땐 못보는데 😑 막상 끝내놓고 나면, purpose driven life, bad samaritan이나 audacity of hope 때 마냥 엄청 뿌듯하긴 하겠지만서두.
너무 좋은 책!
아껴 읽다 이제 다 읽었네~
어떤 챕터는 펑펑 울기도.
"연약 떠는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
너무 씩씩해도 문제라고 오늘 유투브로 들은 설교에서도 말씀해주심:)
설교 제목은 무려 <안아주심>
코난 도일, 모파상, 푸슈킨 등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문호들이 쓴 괴기소설을 모은 단편집. 어릴 때 다른 책에서 읽었던 찰스 디킨스의 「신호원」이 제일 재미있었다.
야한 듯 안 야한 듯,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다가 진상에 이르면, 이거 너무 배배 꼬인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빅토리아 시대에는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