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지
신미나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
물기 좀 짜줘요
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
꼭 눈덩이를 뭉치듯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
딸꾹질 45-기도
김명
수유3동 강북시장 아치형 간판 옆에 에이스부동산 옆에 송월한미타월 옆에 제일샷시부속 옆에 천하명당 로또슈퍼
오후 다섯 시 십팔 분 동그란 유리 테이블 앞에 머리를 뒤로 꼼꼼히 단정히 당겨 묶은 꽁지머리 저 여인
신중하다
검정 싸인펜은 골똘히 천천히 필살의 한 획을 그으며 위에서 아래로 그 옆 칸으로 사십오 개의 숫자 중 선택 받을 우주의 암호를 일생의 가장 중요한 시험을 보듯이 삶의 마지막 생명줄 움켜잡듯이 그분께 보내고 있다
유월 저녁
이상국
아내의 생일을 잊어버린 죄로
나는 나에게 벌주를 내렸다
동네 식당에 가서
등심 몇 점을 불판에 올려놓고
비장하게
맥주 두 병에
소주 한 병을 반성적으로
그러나 풍류적으로 섞어 마시며
아내를 건너다보았다
그이도 연기와 소음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더 이상 이승에서는
데리고 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설렁탕과 로맨스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앉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앉아 한번 더 마주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
단 한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추적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내와 설렁탕집에
(시집 <와락> 창비. 2008)
20억 광년의 고독
다니카와 슌타로
인류는 작은 공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또 일도 하면서
간혹 가다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한다
화성인들이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을지도)
하지만 가끔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만유인력은
끌고 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찾는다.
우주는 점점 팽창하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불안하다
20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무심코 재채기를 했다
섬
김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런 젠장
원태연
생각이 날 때마다
술을 마셨더니
이제는
술만 마시면
생각이 나네.
여수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지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사랑은
채호기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봄 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