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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었다 (허수경 시인)

돌이킬 수 없었다

                   허수경 시인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치욕스럽다, 할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쉽게 잊힐 일도 아니었다 

 

흐느끼면서도

혼자 떠나버린 나의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칼은 젖어서

감기가 든 영혼은 자주 콜록거렸다 

 

누런 아기를 손마디에 달고 흔들거리던 은행나무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첼로의 아픈 손가락을 쓸어주던 바람이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의상을 갈아입던 중년가수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누구 때문도 아니었다

말 못 할 일이었으므로

고개를 흔들며 그들을 보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터미널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가방을 기다렸다 

 

술냄새가 나는 오래된 날씨를 누군가 매일매일 택배로 보내왔다 

 

마침내 터미널에서

불가능과 비슷한 온도를 가진

우동 국물을 넘겼다 

 

가방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예감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참 무참히 돌이킬 수 없었다 

편지 (김남조 시인)

편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을 쓰면 한 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랑의 노래 (김나연)

가난한 사랑의 노래

                                                                        - 김나연 

 

1. 

 

하루는 네가 술에 취해서,

이번 달 카드 값을 막느라 월세를 동생에게 빌렸다고 쓸쓸하게 웃었어.

차마 울지 못해 웃었겠지. 

 

가난한 애긴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하기 힘든데, 네가 네 한 달 치 가난을 나에게 알려줘서 사실 기분이 좋았다고 하면 난 못된 애야? 그런 네 바닥을 얼마든 더 보고 싶다고 하면 난 모자란 앤가? 

 

2. 

 

나는 사실 네가 나만큼은 벌었으면 좋겠어.

사실 조금 더 벌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너랑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너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네가 하고 싶은 게 생겨도 내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게. 우리가 하고 싶은 게 늘 검소하고 순수할 수 없으니까. 나는 이제 이런 내가 속물이라고 생각 안 해. 이 세상 누구도 손가락만 빨며 살고 싶어 하지 않잖아. 그렇다고 내가 크루즈를 타고 세계여행을 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선택지 앞에서.

고민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그것뿐. 

 

3. 

 

나는 너한테서 나는 가난의 냄새가 너무 싫었어. 은유가 아니라 네 옷에선 늘 쿰쿰한 냄새가 났어. 볕은커녕 환기도, 습도 조절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반지하 원룸. 그 원룸 벽면에 틈도 없이 쌓아 올린 다이소 플라스틱 서랍장, 2단 행어. 그 안에서 제대로 숨 쉬지 못해 모든 냄새가 베 버린 옷들. 

 

널 만나면 네 옷에서, 속옷에서 그 반지하의 냄새가 났어. 현관이 부엌이고, 부엌이 식당이고, 그 방인지 복도인지 알 수 없는 공간 구석에 높인 접이식  상. 너에겐 식탁이자 책상이고 TV장이었지. 셀로판지로 꾸민 그 합판에 올려둔 노트북이 TV를 대신 하는 방. 노트북으로 밀린 예능을 보다 그대로 식탁 앞에서 잠들어버리는 방. 그 모든 공간이 네 옷에 냄새로 녹아있었어. 

 

나는 그게 끔직하게 싫었어. 페브리즈조차 가릴 수 없는 가난의 냄새. 내가 사준 명품 브랜드 향수도 뚫고 나오는 우리의 처지. 처지의 민낯. 

 

내가 속물이라도 네가 날 욕이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아님 내가 조금 더 능력 있는 집안 막내딸이면 좋았을 걸.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타고나지 못했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진 못했지만 이 악 물고 노오력이라도 할 수 있게 이라도 날카로웠어야 하는데. 혀라도 교활했어야 하는데. 

 

(김나연 독립출판 에세이집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중에서)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사랑의 마약 밀매상적 요소 (전혜린)

사랑의 마약 밀매상적 요소 

                        - 전혜린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밀매상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1964. 4. 1. 일기) 

 

(전혜린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말 하지 않았다’ 중에서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그리움 (나태주 시인)

그리움

                                          - 나태주 

 

가지 말라는데 가고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첫사랑의 강 (류시화 시인)

첫사랑의 강 

                                                                            - 류시화 

 

그 여름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지

물속에 잠긴 발이 신비롭다고 느겼지

검은 돌들 틈에서 흰 발가락이 움직이며

은어처럼 헤엄치는 듯했지 

 

너에 대한 다른 것들은 잊어도

그것은 잊을 수 없지

이후에도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 첫사랑의 강

물푸레나무 옆에서

너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많은 여름들이 지나고 나 혼자

그 강에 갔었지

그리고 두 발을 물에 담그고

그 자리에 앉아 보았지 

환영처럼 물속에 너의 두 발이 나타났지

물에 비친 물푸레나무 검은 그림자 사이로

그 희고 작은 발이 

 

나도 모르게 그 발을 만지려고

물속에 손을 넣었지 

우리를 만지는 손이 불에 데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지 않는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때 나는 알았지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가 한때 있던 그곳에

그대로 살고 있다고

떠나온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생활 (다자이 오사무)

생활

                 - 다자이 오사무 

 

기분 좋게 일을 마친 후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차의 거품에

어여쁜 나의 얼굴이

한없이 무수히

비치어 있구나 

 

어떻게든, 된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시인)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나도 소주 다섯 병 마실 수 있다 (최승은 시인)

나도 소주 다섯 병 마실 수 있다

                       - 최승은 

 

새벽이 그토록 아름다웠던가

남편을 기다리는 긴긴밤을 지나

한움큼 곤청하늘이 기일게 눈을 뜬다 

 

모르는 손님처럼

집으로 찾아드는 남편

밤이 묻어나는 술내음도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

나는 술병을 딴다

소주 한 병, 두 병, 세엣, 네엣, 다섯 병 

 

"나두 소주 다섯 병쯤은 끄떡않고 마실 수 있단 말이야 "

눈물섞인 목소리 

 

아, 생각만으로도

정말 취한다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시인)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닷가 보이는 언덕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 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

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

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

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수 있

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어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

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

다고 생각 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

뭇거뭇 돝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탉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 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 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

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

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 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

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

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 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 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 

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

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 가다가 머물러

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

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로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아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 처럼 천천히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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