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같은' 지능과 사고에 대한 기대에는
인간의 방식을 우선으로 하는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
감각기관을 통한 오감의 자극 수용, 호르몬에 의한 감정굴곡,
시공간 인지와 과거 기억에 기반을 둔 미래추론과 연산, 직관 등은
인간의 신체적 특징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무형의, 또는 물리적 구성이 상이한 것에
인간적 사고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인간적 사고를 기계에 그대로 구현하거나,
기계가 인간의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중단기적으로는 AI는 AI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쪽으로 노력이 집중될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계들이
모든 자연계 현상과 물리법칙, 인간의 정신과 심리까지
디지털로 구현해 가상세계를 만들었던 것처럼
AI는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AI는 수많은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값을 우리에게
보다 자연스러운 자연어로 보여주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그것을 어디까지 의사소통으로 인정하고,
인간적 사고로 정의할지는 이용자 각자가 정해야 할 문제다.
이 책에서 글쓰기에 대하여...
존프리먼의 소설가를 읽는 방법에서 이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재미의 본질 451>의 마지막장 너무 인상깊었다. 이 글쓰기의 시점이 1998년 쓴 것이라니..
인상깊은 문구를 적다보니깐 너무 길어졌다. 이 책은 다 안 읽더라도 이 재미의 본질 챕터는 10페이지정도...한번 꼭 읽어보기를..특히 글쓰는자의 마음을 정말 제대로 짚지 않았는지..
역자도 이공계로..
신형철님이 추천사에서 너무 강하게 고마움을 표시해서 더 눈여겨봤다.
<< 당신이 픽션을 쓰기 시작할 때, 글쓰기는 전적으로 재미일뿐이다. 딴 사람이 그 글을 읽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고, 당신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을 떨쳐내기 위해서 쓴다. 당신의 환상과 괴상한 논리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자신의 면모로부터 벗어나거나 그것을 변형시키기 위해서 쓴다. 그런일은 정말 가능하고, 그것이 가능할때 글쓰기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 그러나, 이제 상황이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 더구나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당신은 이제 남들을 위해서 글을 쓴다고 느낀다. (...) 순수한 개인적 재미라는 동기를 남들의 호감을 받고 싶다는 동기,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에게 감탄하고, 당신을 좋은 작가로 여겼으면 하는 동기로 교체되었다. (...) 자위가 아니라 이제 유혹의 시도가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 유혹의 시도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제 거절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이 재미를 상쇄시킨다.
애초에 이일을 하려면 어느정도의 허영이 꼭 필요하지만 그 어느정도를 넘어선 허영은 치명적이라는 문제다. 이 시점에서 당신이 쓰는 글의 90%이상을 남들이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압도적인 욕구가 동기가 되어쓰이고, 그 욕구에 영향을 받은 글이다. 그 결과 글은 허섭스레기가 된다. 허섭스레기 작품은 쓰레기통으로 가야한다.(...) 이 대목에서 잘난척을 해보자면 이 구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든 당신의 원래동기, 즉 재미로 돌아갈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 당신이 되찾는 재미는 허영과 두려움의 불쾌감을 거치면서 변형된 재미이고, (...) 이 재미는 말하자면 놀이로서의 일이다. 혹은 규율잡힌 재미가 충동적이거나 방종한 재미보다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 재미를 새롭게 다스리게 되었을 때 픽션쓰기는 이제 당신 자신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당신이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 혹은 남들 어느 누구도 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조명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주제야말로 알고보면 모든 작가들과 독자들이 공유하고 반응하는 것, 느끼는 것이다. 픽션은 이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아니고, 남들이 가장 좋아해줄 것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보이는 수단도 아니며, 그보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자기자신을 인정하고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 된다. (...)최고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낯선 사람들의 애정이라는 보상은 한낱 먼지에 보투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허섭스레기:좋은 것이 빠지고 난 뒤에 남은 허름한 물건.>
읽어볼 책 고를때 와닿았던 책중 하나입니다.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이 책의 목차중에 <<잘 살고 싶습니다, 지금 여기서>> 라는 부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로컬출판사 5개 작품중의 하나네요.
소수자의 목소리에 한정해서 생각했는데,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싸움, 이름의 의미, 일에대하여, 모임에 대하여
특히 나의 경우 싸움, 모임, 일, 이름이 다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모임을 가져야 할 지, 어떤 일을 해야 할 지가 싸움과 이름과 맞물리면서...
<< 여기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한국에 오면 이름을 정하잖아요. 이름이 중요해요. 이름은 누군가 부르기 위해서 있는게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봐요. 한국에 사주팔자가 있다고 하던데 난 그것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안좋은 이름을 버리려 하고, 자기들이 좋다는 이름으로 바꾸려 하는데, 그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 일하는 것 힘들어요. (...) 나 일 힘들다고 말할 때 집안 일 함께 하자는 거지, 일 그만두고 싶다는 것 아니예요. >>
<<저희끼리 모임을 했어요. 그냥 밥먹고 즐거운 것 보고 했는데도 마음이 답답했어요. (...) 이건 의미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운이 좋아서 여기 모인다. (...)정말 혼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
작가님은 올해 초 빙판길에 넘어지시면서 어깨를 다치셨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의 어머니도 살얼음 낀 길에서 넘어져 발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간병하며 발목 골절 환자가 겪는 어려움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에,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어깨 부상으로 인한 고통을 충분히 짐작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작가님께서는 "어깨를 다치니 의외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더라고요. 머리 감는 것조차 쉽지 않네요."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겨울철 빙판길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안부를 염려했다. 이런 저런 출판계 소식도 나눴다. 열여덟 번째 그믐밤으로 정아은 작가님의 책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북토크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였다. 메일을 쓰지 못하시니 전화가 편하다고 하셔 종종 전화를 했다.
정아은 작가님의 부고 소식을 접한 후 며칠 동안 마음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책을 진지하게 읽는 독자들을 진심으로 아끼셨고, 그믐의 독서 모임 활동을 따뜻하게 응원해주셨던 분이셨다.
영면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안녕하세요,
지난주 장강명씨의 댓글부대와 현수동사람들을 읽고 그믐에 대한 기대감이 들어 가입을 했습니다.
그의 온라인에 대한 이해도 및 로컬에 대한 애정을 믿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믐에서 먼저 팔로워로 참여자로
수림재단이 하는 쇼는 없다부터 참여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제가 어느 날 그믐에서 내 모임을 연다면 처음 열고 싶은 것이
정아은작가와 잠실을 걷고 싶은 것이었는데...
이미 그믐밤에서 정아은작가와 만남의 시간을 가졌었다.
미리 그믐을 알았더라면 그날 한번에 2명을 다 볼 수 있었는데...
정아은님과 장강명님.
https://www.gmeum.com/meet/1049?talkId=59910
더욱 놀라운 것은 오늘 정아은님의 부고소식이었다.
<<현실의 응시자, 정아은 작가 별세…향년 49
‘모던하트’ ‘잠실동 사람들’ 등 리얼리즘 소설과 최근작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등 논픽션까지 종횡무진 현실문학 세계를 파헤쳐 온 정아은 작가가 별세했다. 향년 49. 유가족에게 소식을 들은 출판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 작가가 지난 17일 저녁 세상을 떠났다. >>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73952.html
안타깝다. 정아은님을 통해 현대한국소설의 매력에 더 빠져들었는데..
peace with you !
한겨례문학상 작품들을 쭉 읽으면서 작가 장강명님의 글은 좋아했습니다. 댓글부대를 보면서 아 온라인문화에 대해서도 깊이가 있구나. 그런면에서 아내의 퇴직만으로 이 일을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결국 온라인과 오프라인 로컬 도서관, 자영업등의 연결고리등에 대한 꿈도 이곳에서 한번 해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
저의 댓글부대관련 블로그글의 일부입니다.
인상깊은 구절이 이렇게 많다니..
1장의 사례만 봐도 이 책의 놀라움에 빠져든다. 나도 그냥 지나치다가...
<<
저희가 어떤 사람 신상을 털때, 제일 먼저 해보는 방법이 그냥 그 사람 이름을 구글에 돌려보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 기자님의 신상을 털고 싶다고 처요. 그러면, <임상진>이라는 키워드랑 <010-> 이라는 문자열을 함께 구글에 넣고 돌려요. 그러면 검색결과가 우르르 뜨죠.
그들이 저격했던 대상 중에는 한창 떠오르는 유명 토익강사가 있었다. (...) 여성강사였다. 실력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가슴이 커서 남자 수강생들 사이에서 인가가 많았다. 팀 알렙은 그녀의 가슴이 비대칭이라고 공격했다. (...) 결국 여성강사는 악플을 견디지 못하고 가슴성형 수술을 받으러 활동을 중단했다. 의뢰인은 반색하며 팀-알렙에 보너스를 챙겨주었다.그들은 아예 근거 없는 중상모략도 꽤나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순무식한 물량공세도 효과적이었다. (...) 결국 문제의 교사가 견디지 못하고 사직서를 제출하고 말았다. 그런 댓글을 사회여론이라고 여긴 학교와 동료 교사들이 그에게 압박을 가한듯했다.
'2세대 댓글부대 시대'는 그렇게 막을 올렸다.
책읽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보이는군요. 강연 문화는 책 읽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때 흥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미국처럼 강연회가 많아질 모양입니다.
이 친구들이 자기개발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 템버린 댄스같은 걸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저는 어제까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고집불통인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순진하고 사회경험이 없어서 남의 애기를 스펀지처럼 빨이들이는 아이들이란 말입니다. (...) '얼렁뚱땅 인문학 강좌'는 정말이지 강사의 용기를 칭찬해야 할 수준이더군요. '워킹홀리데이에서 내 꿈을 찾은 이야기'는 꼰대도 이런 꼰대는 없겠다 싶을 정도로 고리타분했습니다. 그런데 듣는 학생들은 아주 열심이더란 말입니다. 왜 그랬던 것 같습니까?
강사가 자기들의 언어를 썼기 때문이죠. 여기 강사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사람도 기껏해야 삼십대 중반인 거 눈치채셨습니까? 기성세대가 말하는 건 일단 불신하고 보는 세대입니다. 인터넷에는 말도 안되는 음모론이 판쳐요. 그런데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쳐준다 싶은 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는 아이들이예요. 우리는 이 점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세대라는 점, 그들의 언어, 그들의 용어
메시지가 마음에 안드니까 메신저를 공격하는거죠. 그런데 이 영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젊은이들이 악평을 해댄다는 점이 아닙니다. 아예 안본다는 점입니다. 저희가 저 평을 찾느라 굉장히 힘들었어요. 인터넷에서는요. 올라오는 글이나 그림, 영상의 99.9%는 그냥 묻힙니다. 돈을 들이든지, 팬들이 도와주든지, 그도 저도 아니면 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든지 해서 처음에 어느정도 궤도까지 끌어올려야합니다.
=>99.9% 라....
사회성있는 영화들은 사실 보고 나면 기분도 찜찜하고 보는 동안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 이거 봤다.'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자랑하려는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임금체불논란이 그런 움직임을 완벽하게 막았죠.
미네르바사례가 있잖아요.
거대언론이 외면하는 문제를 작은 인터넷 신문들이 취재하고 인터넷신문조차 미처 못보고 넘어간 어두운 틈새를 전문 지식과 양식을 갖춘 블로거들이 파고들어갈 줄 알았어. (...) 인터넷 신문이나 블로거들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하냐고. 아니지. 그냥 거대 언론이 하던 나쁜 짓을 아마추어들도 소자본으로 하게 됐을 뿐이야. 거대언론이 점잖게 기업에 겁을 주며 광고를 따냈다면 인터넷신문들은 대놓고 삥을 뜯지. 블로거들은 동네 식당을 상대로 협찬을 요구하고. 이것도 민주화라면 민주화지. 협박, 공갈, 갈취의 민주화.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민주화. 그런 대신에 인터넷 신문들과 블로거가 기존 언론이 쓰지 않던 무슨 좋은 기사를 내놓느냐하면. 누구누구 아찔한 뒤태, 남녀 생각차이 열네가지...>
https://blog.naver.com/darifulhong/223688884324
서문이다. 앞으로 읽어야 할 내용이 한참 남았지만 결국 내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하는 내용이 전개될 것 같아서 기대된다.
다른 모든 동물처럼 인간도 불완전하고, 유한하고, 취약한 면을 가진 동물이라는 걸 작정하고 부인할 사람은 없겠지만, 막상 (단체로) 그 사실을 잊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아니기를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경우가 얼마나 자주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너스바움이 원하는 사회는... 까마득하다. 하지만 그 또한 인간적이다.
어디에 얼마나 소속될 것인지, 또 얼마나 거리를 둘 것인지를 선택하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자면 남들이 내게 무엇을 얼마나 원하느냐만큼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얼마나 원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아야겠지. 전자만 고민하고 후자를 의식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때 외로움(자기소외)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순간들을 알아챌 수 있는 '나름의 지표'를 발견하고 그 신호를 감지하는 점검의 시간을 갖는 게 일상에서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 가고 있다.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에 대해 느꼈던 반감이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한다. 납작하게, 어떤 전형적인 캐릭터로만 이해되는 미국의 동아시아 출신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자신은 '주류 백인 남성'을 몹시도 납작하게 이해하고 꽤 자주 은근한 혐오를 담아 묘사한다. 그런 이율배반, '도덕화된 형태의 혐오'를 그 책을 읽었던 다른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답답하다.
평소에 하고 있던 생각들이 너스바움의 언어로 잘 정리돼 있어서 반갑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는 사람을 주변에선 별로 보지 못했다. 어쩐 일인지 혐오의 언어는 내가 20대였던 1990년대보다 2020년대의 20대에게 더 익숙한 것 같다. 전 지구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