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함께 읽기] #번외. <변화의 세기>

D-29
13세기는 여행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보편화한 세기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여행자들이 여태껏 고대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장소에 실제로 도달한 시대였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36,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앞에서 예고한 대로 오늘(7일)과 내일(8일)은 14장을 읽습니다. 14장은 저자가 "우리(유럽) 역사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고, "이 시기와 견줄 만한 시기는 틀림없이 두 차례의 세계 대전뿐일 것"이라고 말한 1347~1352년의 흑사병 대유행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팬데믹에도 인류 문명은 지속되었죠. 후반부에는 민족주의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것의 태동과 지역어의 등장이 다뤄집니다. 저는 모조리 관심 있는 주제라서, 아주 흥미롭게 읽었답니다.
1347년에서 1352년까지의 기간은 아마도 우리(유럽) 역사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을 것이다. 이 시기와 견줄 만한 시기는 틀림없이 두 차례의 세계 대전뿐일 것이다. 두 세계 대전 모두 급격한 사회 변화와 기술 변화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분 매초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불시에 고통스럽게 죽어 나가고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던 시대를 떠올려 보면, 심지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라 한들 그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157쪽,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우리는 대부분 민족주의를 현대 세계와 연관 짓는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도 마찬가지다. 흔히 중세 군주들은 민족이 아닌 왕국을 다스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민족주의란 개념의 뿌리는 중세 시대에 있으며, 이는 14세기에 가장 강력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165쪽,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1400년경에는 (라틴어의 발상지였던) 이탈리아에서도 민중의 언어인 지역어가 가장 선호되는 언어가 되었다. 이제 유럽에서는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글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가 지역어를 썼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177쪽,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14세기의 핵심 이벤트인 흑사병 대유행을 놓고서 현재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책은 노르웨이의 역사학자 Ole Jørgen Benedictow가 2004년에 내놓은 『The Black Death, 1346-1353: The Complete History』입니다. 특히 이 책에서 Ole Jørgen Benedictow는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으로 인구의 60%가 사망했다고 주장했는데요. 역사학계는 통상적으로 3분의 1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봤던 터라서 논란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언 모티머는 Benedictow의 책을 흑사병 부분에서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어요. 저자의 전공 분야가 유럽 중세사이고, 특히 의학사 연구에도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면 Benedictow 연구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 흑사병에 대해서 국내에는 책이 몇 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책 가운데 필립 지글러가 1969년에 펴낸 『흑사병』(한길사)이 있습니다. 지글러는 역사학자가 아닌 작가지만, 이 책은 1969년에 나왔지만 지금까지도 흑사병 시대를 재구성하는 책으로 읽히고 있어요. 역시, 역사학자(유럽사 석사)가 아닌 작가의 시선으로 흑사병 시대를 정리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존 켈리가 2005년에 펴낸 『흑사병 시대의 재구성』(소소)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한테 국내에 나온 흑사병 책 중에서 읽을 만한 걸 권하면 저는 지글러 책을 언급하고 나서 최근에 나온 켈리 책을 언급하는 편입니다.
흑사병지은이는 중국에서 시작된 재앙의 조짐이 어떻게 유럽 대륙에 이르렀는가에 대해 가장 먼저 서술한다. 뒤이어 이 병의 이름이 왜 흑사병이 되었는지 등을 설명하며 프랑스와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등 흑사병이 휩쓸고 간 나라와 도시를 따라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객관적 시각으로 풀어낸다.
흑사병시대의 재구성 -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시대의 내밀한 이야기통계숫자만으로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흑사병 시대의 다양한 풍경을 소설 같은 문체로 생생하게 들춰낸다. 의학과 인문학의 지식을 결합하여 현재의 우리가 수백년 전의 전지구적 전염병 사태에 품을 수 있는 의문들에도 충실히 답을 내놓는다. 페스트의 전지구적 전염 경로, 당시 자연환경·산업과 페스트와의 관계, 현세에 와서 이뤄진 페스트 연구결과 등을 볼 수 있다.
영국의 SF 작가 코니 월리스의 대표작 가운데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가 있습니다.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 21세기 중반에 역사학도가 직접 자신이 연구하는 연대기로 들어가서 답사(?)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연작 작품이에요. 이 가운데 14세기를 무대로 한 『둠즈데이 북』(아작)이 있어요. 코니 월리스는 아주 팬이 많은 SF 작가이고,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와 『둠즈데이 북』은 가운데에서도 최고로 꼽히니 이참에 한번 살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특히 『둠즈데이 북』은 흑사병이 유행하는 영국 마을이 무대입니다. 앞에서 @소피아 님도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제목은 11세기 편에서 나온 1086년 영국의 왕 윌리엄 1세가 작성한 토지 조사부이자 유럽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인 『Doomsday Book』에서 따온 것이죠.
둠즈데이 북1990년대 SF계를 대표하는 소설가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 북>이 출간됐다. 경계소설 시리즈의 네 번째 책으로, '옥스퍼드 시간여행 연작 (단편 '화재 감시원', <둠즈데이 북>,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두 번째 이야기이다.
14세기는 공포가 휩쓸고 간 세기였다. 사람들은 매일 밤마다 오늘이 이 세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152,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음에도 사람들은 재산 소유권을 내던지지도, 파종과 수확을 멈추지도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법과 질서가 붕괴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152-153,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코로나 시기를 건너 오면서 인류의 회복탄력성에 대해 깊이 감명받았던터라, 위에 인용한 문구에 동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1차 세계대전 전사자의 200배 많은 사람이 이 시기 흑사병으로 죽었다는 부분에선 많이 놀랐구요. 심지어 원자폭탄을 ‘2발씩 매일매일 7개월간 터트린 것’과 같았다고 하니, 14세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공포와 싸운 건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한 세기씩 읽으면서 훗날 있을 잘 알려진 사건의 시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데, 14세기를 읽으면서 그 점이 두드러졌습니다. 이후 헨리 8세가 로마가톨릭과 갈라서는 것도 (물론 결혼 문제도 있겠지만) 갑툭튀가 아니라, 에드워드 3세때부터 프랑스인 교황과 긴장 관계였다던가, 혹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지역어가 민족주의와 결합하고 지방 군주들의 후원을 얻는 분위기가 퍼진 14세기부터 시작된게 아닐까, 하는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덧붙여, 이제껏 저는 단테의 <신곡>이 라틴어로 쓰인 줄 알았답니다?!
흑사병은 7개월 넘게 계속되면서 온 나라를 파도처럼 휩쓸었고 잉글랜드 인구의 약 45퍼센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연간으로 따지면 사망률이 77퍼센트에 달한 셈이다. 즉 1348~1349년의 사망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200배나 높았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47 ch. 14세기,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흑사병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교황청 관료들은 기독교인 2,400만 명이 사망했다고 계산했는데, 이 숫자가 전체 기독교인의 3분의 1에 해당한다고 여겼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사망률은 이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 60퍼센트가 사망했고, 잉글랜드에서는 사망률이 60퍼센트를 살짝 넘겼을 가능성이 있으며, 카탈루냐와 나바라에서는 60퍼센트, 이탈리아에서는 50에서 60퍼센트가 사망했다. ...... 그러나 1347년 이후로 유럽 사람들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유럽인들은 계속해서 죽을 준비를 해야했다. 흑사병은 이 범유행 전염병의 첫 번째 파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전염병은 1361~1362년, 1369년, 1374~1375년에 돌아왔으며, 이후 3세기 동안 평균 8년에서 12년마다 돌아왔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52,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14세기의 가장 중요한특징은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음에도 사람들은 재산소유권을 내던지지도, 파종과 수확을 멈추지도 않았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53,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1400년 경에는 서유럽 거의 모든 곳에서 농노제가 무너졌다. 부자유 소작농들이 영주에게 지불해야 했던 소작료는 1374~1375년에 있었던 제4차 페스트 범유행 이후로 줄어들었다. 땅은 충분한데 소작농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 노동자들을 토지에 묶어두었던 봉건적 구속은 제정적 의무로 대체되었다. 강요된 충성심을 돈이 대신했다. 시골에서는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를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도시에서는 자본주의가 이미 완승을 거둔 뒤였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56-157,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민족주의란 개념의 뿌리는 중세시대에 있으며, 이는 14세기에 강력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당시에는 민족주의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민족주의는 정체성의 표현이었다. 고향에서 먼 곳으로 떠났거나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자신이 어떤 민족이라는 식으로 집단적으로 묘사했다. 둘째, 교회의 관점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세계의 특정 지역에서 온 고위 성직자 집단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맥락에서는 왕과 백성들이 특정 지역이나 귀족 집단, 왕실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연합할 때 민족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65-166,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비록 민족주의의 음영과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14세기에는 민족적 이익이 기독교 세계의 단결이나 교황의 권한보다 명백히 더 중요해졌다. 1300년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세속적으로는 자신들의 영주에게 충성을 바쳤고, 종교적으로는 주교에게, 나아가 교황에게 충성을 바쳤다. 1400년에는 상황이 더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충성심이 지역과 민족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 과세제도, 의회 제도, 언어, 법, 관습이 모두 민족이라는 개념에 녹아들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왕에게 맞서는 동시에 자기 민족에 충성을 다할 수 있었다. 실제로 14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적 우선순위에 따라 의회에 의해 두 왕이 폐위되었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71,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14세기 흑사병으로 인한 농노제 해체 등 사회변화는 교과서에서 배워서 알고있었지만 작가의 서술이 제가 대략 알고있던 사실에 색채를 입혀주는 느낌이었습니다. 민족주의는 그저 1648 베스트팔렌 조약 = 민족국가 출현 이렇게 도식화해서(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운 듯;;) 머리에 들어있었는데, 그 맹아가 14세기부터 나타났군요. @소피아 님께서 이 책을 읽고 세기 간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말씀 해주셨는데 공감합니다. 파편화된 지식에 서사를 부여하니 훨씬 이해가 잘 됩니다. (저자의 전공 탓에 예시들이 잉글랜드에 치우쳐있어 보이는 건 아쉽지만서도..)
@소피아 @모시모시 네, 저도 두 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제가 함께 읽어보자고 권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다들 재미있게 읽으셔서 괜히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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