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속다문화]#1. 모두에게 복된 새해

D-29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본다. 신호등의 불빛이 바꿀 때마다 자동차들이 일제히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흘러든다, 조금 열어 둔 창문 틈으로. 그 소리가 파도 소리를 닮아, 내 귀가 자꾸만 여위어간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보면, 수천만 번의 겨울을 보내고 다시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하는 해변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므로.
세계의 끝 여자친구 p.141, 김연수 지음
덤덤한 어투로 사트비르 싱과 서로 맞아가는 듯, 비틀어지는 듯, 대화를 이어나가는 주인공의 심리가 글의 마지막으로 다가갈 수록 묘하게 긍정적이게 느껴지는 것이, 글을 읽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또한, 주인공의 감각이 느끼는 주변 환경의 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해서 나까지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설속 다문화로 새로이 시작하시는군요! 마침 제 새 일이 다문화관련 육체노동 literally인데 말이죠; 구경 잘 하겠습니다.
다문화 소설에 대해 논할 때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는 꼭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이 논문집에서 다루어서 교과서(신사고 문학)에 나온 <명랑한밤길>과 비교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모임 열었어요. 학생들에게도 이런 독서플랫폼 있는 거 알려주고 싶은 목적도 있었구요.
한국 다문화 소설의 서사 담론 연구(양장본 HardCover)타자가 서사 담론의 조건에서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 알아보고, 다문화 사회의 타자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새로운 소수자들을 등장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자본주의로 인해 인종과 민족, 국가라는 단일성이 사라지면서 인류는 주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따라서 이주자의 타자성은 주체와의 권력 관계에 의해 새롭게 설정되고 있다. 다문화 소설 속에 나타난 이주노동자는 한국 사회에서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는 주체에
혜진 영어 잘 못합니다. 맞습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140, 김연수 지음
이 소설의 사트바르 싱이 겪었던 일은 내가 겪었던 일과 비슷하기도 하다. 다문화 사회속에서의 연애에서 서로간의 마음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사트비르 싱이 혜진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소설 속에서 싱은 영어와 한국어의 언어적 차이와 한국어만의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 혜진과 의사소통이 잘 안 되었다. 나도 1년 넘게 겪었던 내 고민을 학교 선생님들에게 표현할 용기를 내는 게 힘들었다. 내 적성에 맞지만 쉽지 않은 꿈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을지, 아니면 내 꿈을 계속 가져 이루도록 노력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그 꿈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에 대해 선생님들께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주변 선생님들에게 조금씩 내 속마음을 표현하니 결국엔 내 속마음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 나는 싱과 달리 내 고민에 대한 표현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긴 하지만, 내가 싱보다는 우리말에 훨씬 능숙하지만 서툰 마음 때문에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쉽기도 했다.
성준이가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경험과 연관지어 이해한 것이 참 좋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기는 것은 일부분인 것 같아. 더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싱처럼) 그것을 판단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려는 태도인 것 같아. 그래서 작가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이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했지.
그때 나는 용서라는 말이 떠올렸다. 먼 훗날의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경우는 어떨까? 먼 훗날의 나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할 것인가?
세계의 끝 여자친구 모두에게 복된 새해 p123, 김연수 지음
‘용서’라고 하면 내가 남을, 혹은 남이 나를 용서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남을 용서하고 용서를 받는 것보다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이 더 힘들고 용기가 필요하다. 아마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남보다 나를 더 낮게보고 험하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자신이기에 잘못됨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남보다 나를 더 용서해주지 않고 자책만을 이어간다. 우리는 과연 언제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TV 소리를 줄이고 부엌의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와 이 친구에게 하나를 권했다. 시크 교도들이 술을 마시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내 상식으로 봐서는 안 마실 게 분명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마다하는 이 친구에게 맥주를 권했다. 어쨌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밤인데다가 서로 좀 취하게 되면 이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친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캔을 땄다. 우리는 캔으로 서로 건배한 뒤,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이 친구가 오른손으로 수염을 한번 쓰다듬는 동안에도 캔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나는 한번 더 건배하자고 캔을 내밀었고 우리는 맥주를 들이켰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p.136, 김연수 지음
길지 않은 글들로 연말 특유의 분위기를 예쁘게 나타내고 상대방과 조금이나마 친해지고자하는 주인공의 진실한 마음이 와닿아서 내가 마치 주인공의 상황이 된 것 같았다.
한 해가 흐르고 또 한 해가 지나는 동안, 음정은 틀려지고 건반은 망가진다. 그 아이의 한국어가 이미 죽은 한국어인 것처럼, 그 아이가 돌아와 피아노를 친다고 해도 그때 그 시절의 음률을 노인이 듣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바뀔 뿐이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p.134, 김연수 지음
이 구절에서 음정이 틀려지고 건반은 망가진다는 표현이, 노인이 다시는 그때의 음률을 듣지 못할 거라는 말이 노인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확인 사살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맞지 않는 소리와 건반의 모습이 현재 '나'와 아내 사이의 어긋난 마음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해서 인상깊었다.
"또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혜진이 내 이야기 같은 것도 했습니까?" 웃음을 그치고 내가 말했다. "당신 이야기 같은 것은 안 했습니다. 코끼리 보고 혼자를 했습니다." "코끼리? 혼자? 환자?"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서 내가 되물었다. "코끼리 그림 보고 혼자를 했습니다. 하나. 혼자라고 말했습니다." "아아. 혼자. 그런데 뭐가 혼자라고 말했습니까?" "혜진의 마음, 혼자입니다." 나는 이 친구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게 아내의 심장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인지, 아내가 스스로 혼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인지.
세계의 끝 여자친구 p.138-139, 김연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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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끝까지 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과연 서툰 한국어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싱의 한국어 실력보다 더 서투른 것은 남편의 마음이었다. 혜진은 늘 혼자여야 했다. 그리고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편은 잊고자 하면 잊어지는 사람, 혜진은 잊기보다는 추억하며 간직하는 사람.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인데, 부부로서 만났으니 혜진이 모래에 아기를 그리면 남편은 파도처럼 그 위를 덮쳐왔을 것이다. 혜진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잊었다고 생각한 아이를 잊지 못하며 매일매일 모래 위에 아이를 그렸을 것이다. 남편은 그날에, 눈이 사람 키처럼 덮여 있고 그 위로 연약한 눈발이 휘날리던 그날에도 파도였다. 그는 자신이 흐르는 대로 흘렀을 뿐이다. 파도는 원래 모래 위로 밀려오는 거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혜진도 그걸 알아서 단 한 번도 남편에게 화내지 않았다. 파도에게 역정을 내면 잠잠해지던가, 혜진은 그저 침묵했다. 한국어는 어눌해도 그 안에 담긴 다정함, 모래처럼 따뜻한 순수함만큼은 명료한 싱 앞에서 혜진은 자신이 모래 한 줌과 같음을 밝혔다. 그녀는 처음으로 위로를 만났고 그 앞에서 한없이 무너졌다. 남편은 아마 끝까지 혜진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혜진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그들은 말 할 수 있는 만큼 말하고, 그 후엔 그저 사랑하기로 한다. 서로를 덮으며, 섞이는 듯 섞이지 않는 마음을 안쓰러워하며 서로를 사랑한다. 우리가 그린 수평선 너머로 새로운 해가 떠오르기를 소망하며.
감상평이 마치 소설같아. 문장이 너무 아름답네. 혜진을 모래에, 남편을 파도에 비유한 것도... 파도에게 역정을 내면 잠잠해지던가... 같은 한국어를 능숙하게 쓰고 10년 이상을 같이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사는 부부는 서로 닿지 못하는데 만난 지 5개월 언어도 문화도 사는 곳도 판이하게 다른 싱과 오히려 진정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 '말하자면 친구'가 된다는 것이 참 역설적이다. 그치? +이 소설을 읽고 내가 그치? 을 발화할 때마다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 친구는 거실에 놓인 저 피아노를 조율하겠답시고 장장 한 시간에 걸쳐서 버스를 타고 온 것이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121p, 김연수 지음
아내와 '그 친구'의 관계가 매우 좋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이는 아내는 '그 친구'가 남편보다 이야기가 더 잘 통하기에 점차 그와 친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별 의미 없어보이는 구절이지만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인물들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해서 인상깊었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본다. 신호동의 불빛이 바필 때마다 자동차들이 일제히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홀러든다. 조금 열어 둔 창문 틈으로. 그 소리가 파도 소리를 닭아, 내 귀가 자꾸만 여 웨어간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보면. 수천만 번의 겨울을 보 내고 다시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하는 해변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노낌이 들므로. 그게 그 해변의 제일 마지막 겨울이라서 파도 소 이를 듣는 일이 그토록 외로운 것이라고, 그렇게 두 눈을 감고 나 는 가만히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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