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혼자 읽기

D-29
마리오 드라기의 회상에 따르면 1970년대 MIT 대학원 시절 미국인 지도교수들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임금을 주려는” 유럽의 의지를 대단히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유럽중앙은행의 새로운 수장에게 노동시장 개혁과 재정 긴축 사이에는 “어떤 거래나 교환의 여지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또한 “재정 목표에 대한 포기는 즉각적인 시장의 반응을 이끌어낼 것이었다.” 마리오 드라기는 거기에 덧붙여 자신은 그런 원칙들을 완화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7장 경제 악순환,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2012년 2월 25~26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재무부 장관들과 중앙은행 총재들의 회담에 대한 IMF 보고서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세계 경제에 대한 “중대한 위험”은 세계적으로 심화된 “절약의 역설”이라는 것이었다. 전 세계의 가계와 기업과 정부가 한꺼번에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고 나섰고 그 때문에 경기침체의 위험이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8장 유로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2006년 오바마는 해밀턴프로젝트에 관계된 높으신 분들에게 끔찍한 실상을 일깨워주었다. “일리노이주의 디테이터나 게일즈버그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의 실상을 아십니까. …… 정말로 피눈물을 흘리고들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첫 재임기간에 골몰한 경제정책은 대부분 그런 지역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월스트리트와 글로벌 금융업계를 구해내는 싸움이 더 급했던 것이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9장 아메리칸 고딕,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부동산 시장이 위험할 정도로 과열되었지만 2008년 무렵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수준에 불과했다. 실제로 1950년대나 1960년대와 비교해보면 성장세가 한참 느렸고 디트로이트 같은 지역들이 그런 불안한 상황에 놓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실업률은 결코 인상적일 정도로 낮아지지 않았고 물가는 완전히 그대로였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심지어 그런 엄청난 거품조차도 전체적인 수요를 초과할 정도로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는 데 충분하지 못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9장 아메리칸 고딕,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미국의 최근 경제사가 놀라운 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래리 서머스는 적어도 지난 20여 년 동안의 미국 경제성장이 취약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단지 “보통의” 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금융 거품에 의존해왔다는 것이다. 최근 몇 십 년을 돌이켜보며 래리 서머스는 이렇게 질문했다.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한 여건 속에서 경제가 만족스럽게 성장하는 모습이 지속되던 시절을 찾을 수 있는가? 물론 그런 시절을 찾을 수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9장 아메리칸 고딕,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가장 최근에 실시한 세금 납부 내역을 바탕으로 계산해본 결과 2009년 이후 경제회복을 통해 이룬 성장세에서 미국 국민들 중 1퍼센트가 성장으로 인한 혜택의 95퍼센트를 독점했다. 이 극소수의 사람들은 수입이 무려 31.4퍼센트나 늘어나는 현상을 경험했다. 반면에 미국 국민들의 99퍼센트는 금융위기 이후 실질적인 수입 증가를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9장 아메리칸 고딕,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미국 전역에서 인종이 아니라 사회적 계층이 삶의 기회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며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맞아 심각하게 다뤄야 할 문제는 미국 외곽 지역 백인 노동자 계층이 느끼는 절망감이었다. 특히 애팔래치아산맥 주변의 웨스트버지니아주와 켄터키주 등은 구조적 변화와 교육 문제, 그리고 일종의 계층이동 불가능성이 신문 1면을 장식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멕시코에서 들여오는 값싼 헤로인과 싸구려 합성마약의 치명적 조합으로 상징되는 유행성 약물중독이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9장 아메리칸 고딕,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투자의 귀재이자 억만장자로 유명한 워런 버핏은 이런 말을 남겼다. “사실 지난 20년 동안 사회 계층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고 내가 속한 계층이 승리를 거두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9장 아메리칸 고딕,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이 사건은 워런 버핏의 개인적 양심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21세기 미국의 권력균형이 철저하게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사회적 개선을 위한 방안들은 결국 미국 사회의 더 큰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것을 더 내어주려는 의식 있는 부자들에 의해서 실행에 옮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9장 아메리칸 고딕,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국민들은 경제와 정치 제도가 자신을 오히려 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우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장들은 종종 음모론으로 치부되었고 또 때로는 그게 당연했다. 티파티 운동 등을 이용해 유명세를 쌓은 브라이트바트(Breitbart) 같은 우파 인터넷 뉴스 매체들은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 성향의 의견들이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온라인 지면을 제공했다. 그렇지만 그런 악의적인 내용들과 억지논리를 제외했을 때, 불평등은 “총체적”인 문제이며 “시스템”이 보통의 미국 노동자 계층에 불리하게 조작되어 있다는 가정은 피해망상이 아닌 현실적 결론이라는 사실 또한 알았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9장 아메리칸 고딕,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2014년 1월 로버트 라이시는 의회 증언대에 섰다. “나는 정부 각료로 일했고 지금 어떤 문제가 있고 개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대중의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성장의 결과물을 나누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진보주의 운동과 비슷한 규모의 운동이 필요하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9장 아메리칸 고딕,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우크라이나는 민주주의를 도입한 이후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돈이 간절하게 필요했고 또한 안정적인 천연가스 공급도 필요했다.” 마르틴 슐츠는 자신은 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편에 붙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에서는 위기에 빠진 다른 국가들을 돕는 일이 그리 인기 있지 않다. …… 러시아의 제안을 한번 보라. 그들은 즉각적인 지원을 약속했는데 서유럽은 그런 역량도 없을뿐더러 그런 부담을 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21장 “X같은 유럽연합”,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1월 16일, 의회의 다수당이라는 이점을 활용해 헌법 개정을 시도하자 두 번째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고 우크라이나 전역의 관공서들이 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무렵 유럽연합과 미국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명백하다. 미국 정부가 얼마나 이 일에 깊게 관여했는지는 미국 국무부 유럽 담당 차관보인 빅토리아 뉼런드와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 사이에 있었던 대화가 새어 나오면서 밝혀졌다. 이 대화는 당시 미국이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을 어떻게 노골적으로 일종의 도구처럼 보았는지, 또 미국과 유럽연합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21장 “X같은 유럽연합”,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2014년 1월 28일 뉼런드 차관보는 파이엇 대사와 미국이 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다 불쑥 이렇게 내뱉었다. “우리가 직접 중재에 나서거나 아니면 UN을 통해 중재에 나서면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X같은 유럽연합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21장 “X같은 유럽연합”,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2014년 5월 선거 결과에 대한 주류 언론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현 상황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비판세력 모두를 “포퓰리스트”로 폄하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상황에 저항하는 정치세력들의 조급함과 불합리함은 2010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재정건전화의 좋은 결과들을 무위로 돌릴 것이라는 게 언론의 주장이었다. 유럽의 국경을 위협하는 새로운 위협에 대항해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이때, 이런 정치세력이 유럽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22장 #쿠데타발생,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상황이 아닌가? 경제위기가 고통스러운 긴축조치와 만나 엄청난 대량실업 사태와 급진적인 정치행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푸틴의 침략에 대한 공포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공격이 뒤섞인다면 과거 유럽의 어두웠던 역사에 대한 기억들은 아주 쉽게 새로운 암흑대륙의 끔찍한 형상으로 바뀌어 퍼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유럽회의주의에 대한 종말론적 예측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마도 미국의 월간지 《애틀랜틱》 2015년 3월 호다. “이제 히틀러가 등장하고 유대인들은 유럽을 탈출해야 하는가?”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22장 #쿠데타발생,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5월 들어 브렉시트 찬반투표를 준비하는 양측의 공방은 점점 치열해졌고 이민자 문제도 계속해서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되었다. 캐머런 수상은 사실 감당 못 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는데 5년 전 그는 이민자 수를 “수만 명 수준으로”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2016년 5월 국립통계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2015년 영국으로 들어온 이민자 수는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인 33만 3000여 명에 달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23장 공포 프로젝트,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그 이유나 동기에 상관없이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민족주의의 불길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브렉시트 투표가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표였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확실히 드러나지도 않았다. 그저 영국 밖의 다른 전문가들이나 논평가들이 했던 추측일 뿐이었다. 브렉시트가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그 원인과 결과를 상상하는 일이 당연히 더 합리적이겠지만 브렉시트 찬성파들의 사고방식은 그런 식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찬성파들은 유럽과의 결별이 곧 영국의 자유와 위대함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상상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23장 공포 프로젝트,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보수당의 내무부 장관으로 훗날 영국 수상이 되는 테리사 메이는 6월 23일의 국민투표 결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영국은 유럽연합을 떠나는 대신 세계를 품는 선택을 했다. …… 진정한 ‘글로벌 영국’의 건설을 선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평가한다면 어떨까. 영국의 국민투표는 일종의 무책임한 모험주의의 발로였으며 확실히 영국은 두 번 다시 없을 아찔한 경험을 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23장 공포 프로젝트,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최근의 영국 역사에서 브렉시트 이후처럼 권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기 힘든 순간은 없었다. 잔류파에는 영국의 주요 2대 정당의 지도부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으며 국민 대부분은 우선 영국 정부부터 유럽연합 잔류에 찬성한다고 생각했다. 이 잔류파는 국민투표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고 브렉시트 찬성파에게 권력을 넘겨주었지만, 이 찬성파는 승리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좌파들은 이런 권력이양의 순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왔던가? 그런데 브렉시트는 새로운 시작과는 거리가 멀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23장 공포 프로젝트,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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