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혼자 읽기

D-29
그리스에 정말로 필요한 일은 채무를 재조정하고 채권자들에게 채무 감면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 밖의 방법으로는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버린 빚더미 위에 또 다른 빚을 얹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나중에 치러야 할 대가가 더 늘어날 뿐이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4장 2010년 그리스,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바로 PIIGS란 말이다. …… 우리도 그리스와 같은 처지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될 거라는 것이다.” 하버드대학교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이 2010년 2월 11일 글렌 벡이 진행하는 폭스뉴스 방송에 출연해 한 말이다. 여기서 퍼거슨이 언급한 “우리”란 미국 국민들과 납세자들을 의미했다. PIIGS는 유로존 문제 국가인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5장 채무의 시대,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퍼거슨은 이런 상황을 대단히 과격한 표현들을 써가며 이렇게 설명했다. “짊어지고 있는 채무의 상당 부분에 대해 지불정지를 선언하든지 아니면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떨쳐버려야 한다. 이 정도 규모의 채무를 지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정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어떤 과정을 선택하더라도 정말 고통스러울 것이다.” 만일 금리가 폭등한다면 1년 이내에 미국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퍼거슨은 설명을 이어갔다. “20년 전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상황과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경제 붕괴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정말로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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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16년에 노인들을 위한 복지 시설에서 대중교통, 공립공원과 도서관까지 지방정부가 진행하는 모든 공공사업 분야의 예산이 3분의 1로 삭감되었다. 영국은 이제 점점 더 더럽고 지저분하며 위험하면서 또 미개한 국가가 되어갔다. 실업수당과 장애수당으로 간신히 연명하던 수십만 명의 국민들은 이제 진정한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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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는 모두 상환할 것이며 대가를 치르는 건 아일랜드 국민들이었다. 아일랜드 정부는 “리먼브라더스 사태”와 같은 상황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시장에서의 신뢰회복이라는 결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유럽의 금융위기는 국가별로 납세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긴다고 해서 진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구제금융을 통해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실제로는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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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금융위기는 너무나 규모가 크고 또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해당 국가들이 각자 해결할 수 없었다. 금융위기로 인한 손실액은 은행들의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사업 모델을 통해 수익을 올렸던 유럽 전역의 투자자들이 나눠서 짊어지거나 아니면 유럽 전 지역이 함께 공적 구제금융에 나서야 하는 수준까지 올라갈 지경이었다. 각 국가들이 위기를 모르는 척 속임수를 썼지만 결국 금융위기는 재정위기로 번져갔고 진짜 문제를 외면하는 동안 불확실성은 확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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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발표된 긴축조치에 대해 비판적 경제학자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 왜 전 세계는 역효과가 분명히 예상될뿐더러 수천만 실업자들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 길을 가려고 하는가? 실업자들을 이렇게 방치함으로써 누가 어떤 이익을 얻는가? 폴 크루그먼이 《뉴욕타임스》 지면을 통해 던진 질문이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6장 G-제로 시대,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외계인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지구방위군 창설이 필요해진다면 1년 반 만에 지구촌의 모든 실업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렇지만 2011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고려해볼 때 폴 크루그먼이 21세기 정치에 대해 지나치게 획일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6장 G-제로 시대,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그렇지만 정말로 유럽에서 가장 불안한 부분이 이탈리아였을까? 아니면 실제로는 독일? 유럽 사람 대부분은 메르켈 총리가 정말로 유로화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독일의 원로 정치인이자 유로화와 독일 재통일의 아버지인 헬무트 콜이 메르켈 총리의 손 안에서 자신이 남긴 하나 된 유럽이라는 유산이 과연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지 우려한다는 뜬소문이 나돌았다. “그 여자가 내가 만든 유럽을 망치고 있다.” 헬무트 콜이 어느 기자에게 그렇게 토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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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유럽과 미국의 일반 시중은행들과 연기금들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문제국가들에서 수백억 유로의 자금을 빼내고 있었다. 일단 유로존 국가들이 안전자산을 발행하는 위상을 잃는다면 기관 투자자들로서는 자산 구성을 새로 조정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유럽 은행들도 그에 따른 영향을 받았다. 2011년 여름이 되자 도매자금시장에서 자금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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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가 미치는 영향력의 규모를 감안해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을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시위는 긴축조치에 반대하는 유럽의 엄청난 시위 규모와 비교하면 보잘것없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2011년 10월 15일 동시에 일어난 전 세계적인 “점령하라” 시위에는 스페인에서는 100만 명이, 이탈리아에서는 20만~40만 명이, 그리고 포르투갈에서는 수만 명이 참여했다. 뉴욕에서는 3만 5000명에서 5만 명의 시위대가 행진을 벌였다. 그렇지만 뉴욕 점령은 규모와는 상관없는 훨씬 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반대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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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우 어디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진행되는가에 상관없이 FBI나 심지어 미국 대테러 당국의 감시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작은 규모와 부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인 비주류들의 분노에 대해 미국의 주류 여론이 크게 공감했다는 건 분명하고도 불안한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6장 G-제로 시대,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지나친 일반화이긴 하지만 메르켈 총리의 말은 2011년 가을에 찾아온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징후를 보여주었다. 불과 3주 동안 독일 총리는 언론에는 정치인이 시장과 협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고 교황에게는 정치인이 시장과는 상관없이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모순인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정치가들이 은밀하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시장 중심으로 움직이는 그런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뜻일까?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7장 경제 악순환,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유럽중앙은행은 또한 노동시장 정책에 대해 이탈리아와 스페인 노조의 권리를 침해할 정도의 극적인 변화도 요구했다.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실업률을 줄이려면 그러한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유럽중앙은행의 주장이었다. 통화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회권력과 정치권력의 균형을 뒤집겠다는 참으로 노골적인 시도였지만 유럽중앙은행은 사회적 안정망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단서를 추가함으로써 이런 의중을 애써 감추려고 했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7장 경제 악순환,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유로존 위기를 전 세계적인 우려의 대상으로 만든 건 스페인과 그리스의 청년실업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가 “포퓰리스트들의 위험”이라고 불릴 만한 상황에 뒤늦게 빠져든 것이다. 2011년 유럽의 금융위기에 대한 전망은 각국 정책입안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만일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은행들의 조 단위 대차대조표가 위기에 빠진다면 런던의 시티도 뉴욕의 월스트리트도 더는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2008년과 마찬가지로 그 파급력은 양방향으로 전파될 것이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7장 경제 악순환,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2011년 가을 유로존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가 이끌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어차피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큰 규모의 유럽 방어벽 구축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아니 최소한 독일 정부로부터의 어떠한 합의도 이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2011년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를 무너트린 건 정부간 협력주의에 대한 독일 측의 끈질긴 고집과 거대한 재정적 통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결합된 결과였다. 위기로 인해 불거진 불균형을 타개할 중요한 방안들의 부족으로 각 국가들은 재정 정직성에 대한 독일의 계획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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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 베를린의 총리 주변에서는 어느 누구도 시장의 강압적인 위력에 대해 비통해하지 않았다.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미국보다 정권교체를 더 잘해낸다”는 자랑 섞인 이야기가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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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위기에 대한 수용 가능한 해결책의 변수들을 결정짓는 건 독일연방공화국의 헌법과 독일 중앙은행의 자치권과 독일 중도우파의 정치적 이해관계였다. 만일 메르켈이 간절하게 이야기했던 좌절감의 이런 근본 이유를 알게 된다면 미국은 분명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48년 당시 서독의 기반을 이루는 기관으로서 분데스방크의 초석을 다져준 게 다름 아닌 미국이었으니 말이다. 2011년 11월 칸의 상황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처럼 완전히 새로운 미국과 유럽의 관계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17장 경제 악순환,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시코르스키 장관은 오늘날 폴란드의 안전과 번영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테러행위도 아니고 이슬람 과격분자들도 아니며 당연히 독일의 군사력도 아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핵미사일도 상관이 없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연합의 동부 국경을 따라 부대를 배치하겠다고 위협하던 중이었다. 시코르스키 장관에게 가장 암울한 미래는 바로 유로존의 붕괴였다. 유로존에서도 변방에 있는 약소국들이 함께 무너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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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계속해서 주장했다. “나는 독일에 자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유로존이 살아남아 번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이렇게 요청한다. 독일 말고는 어떤 국가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역사상 첫 폴란드 외무부 장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말한다. 나는 독일의 세력 확장보다 독일의 무기력함이 훨씬 더 두렵다. 독일은 이미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니 유럽을 앞장서서 이끄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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