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강 작가의 소설집 [여수의 사랑]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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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능선] 누구에게나 뚜렷하게 남은 어릴 적 기억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정환이 집을 떠나오며 보았던 진달래 능선이 그러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정환의 발을 잡아 당길 듯 삼킬 듯 덤겨들 듯하던 진달래의 환영.... 또한, 사랑하는 딸을 잃고 나니 세상 아름답던 풍경이 재보다 못하게 된 황씨의 모습에서 한 순간의 크나큰 충격이 만드는 파문은 사라지지 않고 깊은 주름으로 우리 삶에 남겨진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사람의 '쓸모'에 대해 몇 번 언급합니다. '저래 보여도 예전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 좋은 집이었다우. 나무도 어찌나 무성한지 정원이 아니라 숲속 같았지. 저 양반도 그때는 쓸 만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가끔 나무나 뽑아 불에 태우는 황씨에 대한 부동산 중개인의 말입니다. '어떠냐, 나두 아직 꽤 쓸모 있는 사람이지' 정임과 어머니의 사진을 찾아 정환에게 쥐어준 숙모의 표정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니라면 지금 나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동생 정임과 어머니를 찾기 위해 사방을 찾아다니며 지쳐가는 정환의 생각입니다. 1990년대에 20대를 지낸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기 위해 애썼던 것 같습니다. 사회는 사람을 원했고 사람들은 자리가 나면 비집고 들어가 자신을 자리에 맞추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도 가족은 우리 자신을 불안불안한 자리에 눌러 앉히는 원동력이자 멀리 떠나지 않게 잡아주는 테두리였지 싶습니다.
[어둠의 사육제] 사육제는 사순절 이전 행사입니다. 예수의 고난을 따르는 사순절을 대비(?)해 고기 잔치를 벌이는 축제(!)입니다. 솔직히 소설의 내용과 사육제라는 단어의 연관성을 찾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누군가 다가와 '아무 조건 없이 내 아파트를 명의 이전해 줄테니 집 없는 네가 가져라'라고 하면 우선 상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덥석 받아 챙겨야 된다고 생각하는 속물로서, 임신한 아내의 죽음으로 받은 보상금으로 구입한 아파트를 거져 주겠다는 명환도 그걸 왜 내가 받냐고 거절하며 도망치듯 떠나는 주인공도 살짝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보상금이 아내도 아내 뱃속의 아기도 살릴 수 없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 묻혀버린 명환의 미래 또한 살려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야기한 이가, 명환이 그토록 꿈꾸던, 그저 성실하고 가정적인 어느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실이 그런 그와 그의 가족을 보금자리에서 내쫓듯 이사시켰다는 사실이 명환은 아내와 아기의 죽음만큼이나 못견딜 일이었을 거라는 걸 깨닫습니다. 가족에게 외면 당하고 인숙언니에게 배신 당하고 밖에서 훤히 보이는 이모님 댁 아파트 베란다에서 잠을 자게 된, 스물이 되었을까 싶은 주인공에게는 이제 타인의 간섭이라면 그게 공짜로 얻게 되는 고급 아파트라도 받고 싶지 않았을 것도 싶습니다. 아파트를 넘기고 죽으려하는 명환의 의도를 파악한 후에는 더욱, 내 의지가 아니고서는 타인의 삶에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주인공의 강한 결심도 옅보입니다. 그런데 왜, 제목이 [어둠의 사육제]인지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아직 [붉은 닻]이라는 작품이 남았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그건 제 SNS에나 포스팅해야할 것 같습니다. 9월 말 저로서는 중요한 시험이 있고 일을 하고 있는데다 모처럼 한국에 들어온 아이와 아이의 친구를 위해 제주 여행을 다녀오느라 책 읽는 속도를 포스팅이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역시나 저는 한 가지 밖에 못하는 싱글테스커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제껏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작품 활동이 엄청 기대가 되는 한강 작가입니다. 한국이, 한국 문학계가 한강 작가의 존재에 대해 저처럼 자부심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는 한국 문학계가 잘 키워야하는 대단한 싹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안 키워줘도 알아서 잘 클 나무이긴 합니다. 한강 작가를 열렬히 응원합니다. 이 책에 대한 저의 선택이, 이미 알려진 그리고 알려지기 시작한 많은 작가들의 초기 작품을 다른 분들도 찾아 읽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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