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2

D-29
헤이스가 이런 말을 하는데요. 샤오쌍을 북클럽으로 부른 이유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일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샤오쌍에게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라고요. ("나 역시 당신의 매력에 빠지기 위해서였지.") 그런 '작위적인 자아'의 성립을 용인하고 봐주는 관계가 '사랑'이고, 그것은 사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전까지만(서로를 향한 지적 열망이 유효한 시점까지만.. 책으로 치면 책이 어려울 때까지만..) 가능한 것 아닐까요. 연애가 무르익으면... 궁금하지 않잖아요 상대가...? 그때부턴 연애가 그런 나르시시즘적 욕망, 너를 알고자 하는 나에게 도취되는.. 그런 자기 재확인으로서의 욕망 말고 다른 층위로 넘어가는 것이겠고요. 하여간 찬쉐는 이 소설을 통해서 문학은 이런 거다 라는 어떤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 듯해요. 그보다 문학-삶을 연계하는 어떤 세속적인 원리를 속속들이 펼쳐보여주려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독해의 거리감이 발생하는 것 같고요.
저도 힘들게힘들게 완주했어요^^;; 힘들었던 이유는 다들 이야기해 주셨던 그 부분들과 거의 겹치는데요, 제 식으로 말하자면 문학에 대한 내용들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마치 신앙 간증을 보는 것 같았고(신앙 간증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려는 게 아니라 너무 진정한 사연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여간 비문학적인 게 아니었달까), 그러면서도 정작 (가은 평론가님의 지적처럼) "찬양하는 문학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진도 나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던 와중에 제가 계속 생각한 건 이 고루한 말투와 문학에 대한 계몽적 논의들이 제가 처음 농담인 듯 말했던 북클럽에 대한 조롱이라기보다, 현재 중국의 정치문화적 분위기에 대한 모종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거였어요. 문화대혁명 당시 자아비판 분위기가 재현되고 있다든가 상시적 감시 같은 문화적 억압과 같은 뉴스들이 떠오르면서, 외려 그런 문화적 억압이 반영된 표현이 이 이상할 정도로 문어화된 말투가 아닐까 싶었던 건데요, 마침 이런 표현도 나오더라고요. 샤오쌍과 헤이스가 대화하던 중 "보라고, 봐, 또 시작이잖아. 서로를 치켜세우기."
저는 그런 생각을 끝까지 가지고 가면서 읽었는데요, '독서'에 대한 경험을 북클럽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사람들의 말투라든가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 무엇보다 그 문어적이고,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삶의 "결계"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던 사람들이 자기 욕망의 언어를 찾아가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 과정에서 돋보였던 건 비둘기북클럽이 가진 일종의 계급적 전복성이었어요. '독서가 소설 자체보다 위대하다'는 표현이라든가,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작가를 관통함으로써 작품을 쓰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독서라는 행위를 적극적 읽기보단 수동적 쓰기까지 밀어올리는 표현도 그렇지만, 페이로 대변되는 비평가/작가로 대변되는 한마/독자로 대변되는 샤오쌍 세 축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면서 프로와 아마추어가 뒤섞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비둘기 북클럽 회원들이 판에 박힌 듯 관습적으로 서로를 추켜세우고 권위에 취약한 발언들을 하는 것과 달리 자기 욕망에 대해서는 다소 원시적인 것이 이중적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 이질성이 소설의 전개과 함께 일정 정도 뒤섞이는 걸 보면서, 이 소설이 문학에 대한 보편적 입장인 동시에, 판에 박힌 '격정'에서 자신만의 '격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모범적 주제의식을 문학 세계라는 다소 안전한 비유장치를 통해 중국 문학과 중국 문화, 뭐 통틀어 중국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가 있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한 사람이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소재가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다만 가은 평론가님 말씀처럼 저도 이 작품이 그것만을 말하려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문학과 삶의 연결, 권위의 영향을 덜 받는 환경에서 다시 시작되는 문학, 그 탄생의 장소로 '비둘기 북클럽'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문학을 넘어 사회 전반에 다 해당하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중간중간 꽤 선동적으로 읽혔던 '독자'와 '작가'의 위계를 부정하는 내용이나 초보독자의 변화, 고급 독자이자 문학 전문가의 변화 등이 주는 메시지의 힘이 적지 않은 것 같고, 그건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가 좋아하는 특성이기도 한 것 같아요.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격정세계』는 진도 빼는 데 한참 애를 먹었는데요! 완독한 뒤에 돌이켜보자면, 분량도 만만치가 않은데 몰입을 용이하게 하는 배경 제시가 너무 제한적이어서 진입에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초반부터 인물들의 대화가 굉장히 거창하고 추상적인 데 반해 개개의 사연에 대한 언급이 적어서 캐릭터에 대한 인상이 우선 분명치 않았던 듯한데, 이를테면 역자 해설에 작가 본인의 분신으로 소개되는 한마의 사연조차 전체 작품의 약 2/3 지점인 431쪽에서야 서술되더라고요. 또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도 원체 가상의 지역인데다가 이곳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나 풍경 묘사가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이미지를 그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장소건 시대건 배경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나 분위기가 있기 마련인데, 오죽하면 작품 속의 또 다른 가상 작품(작중작)의 풍경 묘사가 가장 소상했던 것 같네요. 이런 경향은 3부, 특히 완전히 결말부에 이르러 은산 이야기가 나올 때에야 좀 덜해지더라고요.
작품을 읽으면서(또 읽고 나서) 든 생각 가운데 하나는 소설 속 세계가 마치 ‘강간문화 없는 대안우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이 꼭 작품 밖 현실을 있는 그대로 따르거나 재현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나보코프 문학 강의』 도입부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네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중점적이고도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영혼과 육체의 진정한 합일”(469), “문학과 성의 관계”(471), “감정과 성에서 [오는] 영감”(530) 등은 현실에서도 지난 한두 세기 동안 남성 작가를 중심으로 다뤄지거나 주창된 주제였고, 이를 빌미로(가령 ‘남자를 알아야 문학을 알 수 있다’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핑계하에) 자행된 무궁무진한 성폭력 사례도 근래에 널리 알려져 있다 보니… 이 작품이 일관되게 예찬하는 문학론을 마냥 순진무구하게 바라볼 수 없게 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삶과 문학을 비롯해 이 작품이 다루고자 내세우는 도식 자체가 너무 단순하고 상투적이라는 인상이 있었고요. 그럼에도 한마의 문학론에 부합하는 작가를 현실에서 찾고 논해보는 것도 가능할 텐데, 아무래도 아니 에르노가 단박에 떠오르더라고요.
저도 힘겹게 완주를 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로 하여금 그간 읽었던 찬쉐의 소설(과 다른 결임이라는 것을 인지하더라도)이 주었던 좋음을 끝내 얻기란 힘들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남은 질문은 찬쉐에게 문학은 무엇일까? 그가 바라는 문학을 향유하는 방식이 이 소설과 같은가? 였는데요. 저에게는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았기 때문이겠죠. 여러분들이 많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이 소설에서 문학은 다분히 신화적이고, 그것을 교조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끝내 버릴 수가 없었어요;ㅅ; 특히나 3장에 이르러 과거 헤이스와 차오쯔의 관계에서 "일상생활 속 대중화된 미학"을 좇던 차오쯔가 헤이스를 따라 문학을 읽어 보기를 결심하고 한 걸음씩 나아갈 때, 그녀의 문학에 대해 이해가 미숙한 것이 아직 성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듯한 서술은... 물음표가 많이 생겼더랬습니다... 이런 식으로 소설 전반이 모 아니면 도식의 이분법적 구도를 취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질 못하더라고요. 문학으로 경험할 수 있는 수 있는 어떤 격정들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내용과는 달리, 찬쉐가 견고하게 만들어둔 틀 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 뒤에 수록되어 있는 옮긴이의 말에서 "문학은 우리의 이런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이런 삶에 다시 격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라고 그는 묻고 있는데요. <격정세계>로는 그러한 격정을 느끼기 힘들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몰입이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로는 긴 분량에 비해 갈등이 없고, 있더라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도 거론하고 싶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소설이 꼭 작품 밖 현실을 있는 그대로 따르거나 재현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고려하며 함부로 예단하지 않으려 스스로 주의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중요한 정서적 기점마다 인물의 감정선이 선뜻 이해되지 않을 때가 분명 있었어요. 페이의 다른 연인에 대해서는 꽤 초반부(113쪽)에 언급되지만, 그럼에도 한마가 자신과의 관계 정착 이후에 다른 상대를 임신까지 시키고 온 페이를 순순히 이해? 용서?(여전히 혼란하다 혼란해)하고, 심지어 뭉클함(352쪽)마저 느끼는 태도도 참 의외였고요. 임신 소식을 듣고 아빠가 되겠다고 해맑게 선언하는 페이의 모습은… 읽는 사람의 머리를 터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작품에서는 임신한 웨에게 돌아가는 선택을 “책임”이라고 얘기하는 대목도 나오는데, 이 부분에 대해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하더라고요. 또 그보다 앞서 한마와 페이의 관계에 벌어지는 균열의 징조 같은 것도 참 투박하게 그려지더라고요. 훨씬 섬세하고 미묘하게 다룰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작품에는 현대적인 것에 대한 지향이 종종 언급되는데, 막상 소설이 내세우는 관계의 형태나 문학론 등은 현대적이지 않을 때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의아하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가령 성애 관계나 가족 관계의 역학도 이성애규범적 구도에서 그다지 벗어나 있지 않기도 하고, 많은 분께서 지적하셨다시피 177쪽이나 319쪽 비롯해서 곳곳에 등장하는 문학 예찬의 간증도 저 또한 보면서 참 낯뜨거웠습니다. 차라리 시대 설정을 분명히 제시하거나 거기에 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곁들였다면, 그래서 배경이 2020년대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받아들인 상태로 작품을 읽었다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럼에도 흥미로웠던 지점을 찾아보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문학 풍토가 굉장히 비제도화된 것이라는 점이었는데요. 물론 이들이 논하고 창작하는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습니다만, 대학 전공 등과 관계 없이 문학을 독학하고 함께 나누는 문화가 다뤄진다는 점 자체가 나름 신선했습니다. 저는 주인공들의 독서모임이 순전히 취미 독자들의 것으로 이해하고 책을 읽어나갔는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구성원들이 평론도 쓰고 창작도 하더라고요. 『소설』(제임스 미치너), 『세스 프라이스 개새끼』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문학계·출판계·문화계·예술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있지만, 이런 분야가 다소 과잉제도화돼 있다는 평소 생각을 해온 터라… 『격정세계』에서는 그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문학 실천을 (추상적 수준에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글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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