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글을 쓰고, 또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며칠 동안 문학에서의 당사자성이라는 표현과 의미를 생각했어요. 조금 새삼스럽기도 하고 뒷북을 치는 것 같기도 한 시간이었는데요^^;; 소송 용어로서 당사자성은 원고와 피고에게 재판의 주도권을 줌으로써 각자가 공격과 방어를 하는 과정에 판사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두는데, 이런 원칙을 두는 건 당사자 소송이 대등하게 대립하고 있는 당사자 사이의 권리 관계에 관한 소송이기 때문이더라고요. 그런 반면 사회운동에서 쓰이는 '당사자주의'란 장애인 인권 운동 등에 있어 인권 운동가 등이 '약자'를 '위해' 혹은 '대신' 활동하기보다 본인이나 그 가족 등, 한마디로 당사자들이 직접 운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런 배경에는 주체성의 강조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아요.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세 번째 계절 #2
D-29
박혜진
박혜진
문학에서의 당사자성이란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작가가 그 정체성을 소재이자 주제로 의식화한 작품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는데 법률적 개념에서의 대등성, 사회학적 개념에서의 주체성이 문학적 개념으로 오면 일종의 '진정성'으로 특정되고, 이건 문학, 특히 소설이 '허구'적 세계이기 때문에 강조되는 특성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여기에는 오히려 대등성에 반대되고 주체성에 반대되는 태도가 들어서는데, 당사자성을 공유하지 않는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제3자적 위치로 멀어지거나 정보 및 해석에 있어 상하관계로 경직된다는 면에서요. 그래서 지운 편집자님 얘기처럼, 또 여러 분들이 경계하는 것처럼, 당사자성이 작품을 해석할 공간을 위축시키지 않도록 '방해'하는 감상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 런 점에서 헌치백은 어느 작품보다 더 당사자성이 두드러지지만 동시에 소설적 욕망이 아주 크고, 그 때문인지 작품에서 멀어지기보다 안으로 들어가서 따지고 묻게 되는 면이 더 많았어요. 보원 평론가님이 말한 "미묘한 긴장"을 느끼는 부분들이 많았던 소설이에요.
박혜진
그나저나 이번 시즌부터 소전서림 '이달의 소설' 선발대 분들도 토론에 참여하게 됐는데, 아직 의견이 올라오지 않아서 궁금증이 증폭하고 있습니다 ㅎㅎ 헌치백이든 V 섬의 짐승이든, 어떻게 읽으셨는지 의견을 나누어 주세요.
황보
안녕하세요, 저는 이 계절의 소설 후발대(마지막에 평점 좋은 것을 찾아 읽고 있는......& 선택받지 못한 도서들의 한 줄평을 쓰고 있는) 소전서림 황보유미입니다. 드디어 저희도 참여할 수 있게 됐네요! 동시에 우왕왕왕한 여러분의 아우라 덕(?)에 감히 막 지껄여도 되나 두려움도 들어요. ㅎㅎㅎ 저는 <헌치백> 먼저 읽었는데요. 앞에서 모두 언급하셨지만, 저 역시 신문 기사의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라는 문장에 먼저 작품을 알게 됐고, 찾아 읽게 되었지요. 그만큼 자극적인 문장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책을 읽고나서 그 자극을 느낀 제가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 문장은 여성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온전히 담아낸 진정한 '원함'의 문장이란걸 알게되었으니까요.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독서 문화의 마치스모를 증오한다.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는 문장에서는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연스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여성 장애인들의 성적욕망'을 담론의 중심으로 끌고온 것이 이 작품이 문학으로서의 의의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앞서 정용준 작가님이 얘기하셨던 "'앎'이 그 자체로 소설의 가장 큰 의미겠다"는 말씀처럼 말이죠. 반면, 서브컬쳐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저로서는 읽기에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는.... ㅜㅜ
(V섬은 아직 읽고 있는 중....)
JSP
저도 새로운 글 올라오나 계속 눈팅만 하고 있었습니다. 살짝 무언가 쓰기에 주눅들기도 합니다만 황보님 글을 보고 용기를 얻어서 올려보려구요.
소박한 독자의 질문을 남겨보고 싶습니다. <헌치백>은 개인적으로 작가의 상황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에 정작 소설을 읽을 때는 당사자성에 대한 인식이 없이 읽었고, 짧은 소설(장편,단편 나누자면 단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로서는 충분히 소설 자체로서 재미있었습니다. 작가를 빼고 소설 자체에 대한 얘기는 많이 없는 것 같은데, 새로운 "앎"의 재미 외에는 소설적 가치는 별로 없는 걸까요?
두 번째는 <V섬>인데, 읽으면서 충격을 받는 중입니다. 지난 달 <V섬>에 대한 호평을 들었던 터라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읽고는 있습니다만, 이게 좀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는데 이게 맞는건가요? 워낙 난감한 읽기를 하는 중이라 질문조차 어색한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강보원
제가 느끼기에 양선형 작가는 글쓰기와 관련된 조건들에 대한 탐구를 계속 수행하는 작가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뭐랄까... 그런 글쓰기 속에서 마주치는 난관들이 있을 텐데, 이 난관들을 관찰하고 냉소하고 동시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음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양선형 작가 특유의 방식인 것 같아요. 가장 큰 층위에서 이야기를 해보면, 어쨌든 이 소설은 '감독'이 화자에게 배우를 해달라는 제안을 하고, 화자가 촬영 장소인 V섬에 가서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감독은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데 그 영화의 주인공인 화자는 이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돈 때문에 섬에 가게 되고요. 그런데 좀 이상해보이는 상황이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글쓰기가 그런 면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가령 내가 소설로 다루고자 하는 어떤 인물의 삶과, 그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속에는 정말 큰 간극이 있는 거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령 내가 어떤 이야기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가정하면... 반대로 나는 그 이야기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생기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V섬>의 화자가 끊임없이 감시를 받는다고 느끼고,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이야기가 되니까요... 말하자면 한편에는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네가 쓰는 것은 아무리 잘 꾸미더라도 실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냉소적 관찰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럼에도 이야기가 실재를 그물처럼 포획하는 현상에 대한 관찰이 있고...
강보원
그러니까 우리가 소설을 두고 '이건 소설일 뿐이야'라고 말할 때, 소설은 실재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건 소설이 그 자신의 총체성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하나의 관점에서 조작된 형성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그 '소설적 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려는 시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비판적 관점은 동시에 하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행위가 실재에 얼마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간과하게 하는 측면도 있는 거죠. 뭐랄까, 영향을 끼친다는 게 어떤 직접적인 피해나 이득과 관련이 될 수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이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하게 어렵게 만드는? 가령 <헌치백>에서 저희가 당사자성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이 작품을 그냥 소설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작가가 <헌치백>의 화자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읽기에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작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가령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떤 특성들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해서 인물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이 작가 자신과 아무리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이미... 어떤 면에서 우리는 '샤카'를 알게 되고 나서 그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 없었던 것처럼 작가인 이치가와 사오, 혹은 더 넓게는 그와 유사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볼 수는 없다는 거죠. 물론 <헌치백>의 경우 이러한 작동은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지만 또 언제나 의도를 초과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저는 이런 부분이 정용준 선생님이 위에서 던지셨던 '당사자가 당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당연하게) 허용되는가?'라는 질문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상반된 관점을 동시에 수용했을 때 소설을 쓴다는 건 어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소설일 뿐) 이미 범죄적인(사물에 대한 착취) 행위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V섬>은 기본적으로 이런 식의 딜레마랄지, 이율배반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들여다보는 소설인 것 같아요. 재현이라는 게 어느모로 보나 문제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고, 소설을 쓰거나 읽는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 문제적인 부분을 옹호하고 싶어하는데, 양선형 작가는 계속 옹호하기 힘든 포인트들을 찾아내고, 은폐되어 있는 장치들을 들춰내고, 우선은 그런 그런 폭로가 자체로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기도 해서 재밌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신이 소설을 계속 쓰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적이게 되는... 그런 구조가...... 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강보원
어떻게 이야기 물꼬를 트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이제... 조금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로 시작을 하게 되었는데요... 뭔가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그래서 저런 이유로 저게 재밌다고? 이 작품의 의도에 그러그러그러그러한 의도가 있어서 즉각적으로 즐거움을 느꼈다고?'라는 의문이 절로 들 것 같아서 약간 민망하네요...
좀 더 읽을 때의 감정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면, <V섬>에서 '감독'이나 촬영을 하는 '개구리복 남자'들이 갑작스럽게 예술에 대한 장광설을 토해내고, 그러잖아요. 굉장히 자기 편의적인 방식으로 예술론을 왜곡하고, 그러는데요. 사실 양선형 소설의 재미는 이 장광설들이 도대체 어떤 위치를 갖는 건지, 그러니까 작가가 이 말들을 조롱하는 건지 진심으로 믿는 건지 비판하는 건지 아니면 싫어도 그렇게 생각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그런 지점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양선형 작가 소설을 읽다 보면 찔릴 때가 굉장히 많아요. 저의 경우에는... 왜냐면 딱 봐도 제정신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말을 쏟아낼 때가 있고, 아주 진지하게 그게 자신의 사상이라고 주장하고, 그러니까요... 그러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믿음직하지 않은 건지, 단단하지 않은 건지 생각하게 돼요. 저의 생각을 바꾼다, 틀렸다고 생각한다기보다는, 그 생각이 굉장히 주관적이고 다른 맥락에 놓였을 때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령 아래의 문장 같은 부분이요.
"저도 예전에는 상심에 취약한 사람이었어요. 비극의 조짐이 슬며시 제 살갗을 건드리기만 해도 어쩔 줄 몰라 동굴로 후퇴하는 사람. 그래도 적응할 수 있어요. 나쁜 냄새 속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면 콧속이 시큰해지고 스스로가 더러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나중에는 후각이 마비되고 이곳에서 나쁜 냄새가 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겠죠. 세상은 원래 이렇게 돼먹지 못한 곳이로구나. 나는 세상에 비하면 개미 한 마리만큼 작지. 개미는 묵묵히 자기가 할 일을 하는 법이지. 누구나 평생 동안 개미의 일상을 건사하다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도둑맞는 법이지. 아무튼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 법이니까 까불지 말고 얌전하게 있어.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참기가 어려워요." (52)
강보원
위의 인용이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소시민적이고 윤리적으로 마비된 생각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 화자는 자신이 한 말을 어떤 진리라고 생각한다기보다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참기가 어려"워서 선택하는 일종의 대안적 서술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쨌든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 이야기가 그렇게 잘못되고 틀린 이야기인가...? 나도 이런저런 일로 힘이 들 때 그냥 내가 놓여 있는 구조를 받아들이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무언가를 시작하곤 하고, 그런 마음이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하기는 힘든데. 그런데 어떤... 그런 생각이나 행동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의 미묘한 부분들, 그리고 그것이 놓이는 위치, 그런 것들을 조작함으로써 양선형 작가는 내가 별 생각 없이 하던 생각이 가지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들추어내는 것 같고, 그래서 그게 저는 독자로서 읽으면서 뭔가 찔리기도 하고 반발심도 들고, '하지만 작가가 이 발언을 무조건 냉소적으로 비판받는 위치에 놓아둔 게 확실한가?'라고 의문을 가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읽어가는 것 같아요. 읽을 때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나 어떤...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믿기 힘들다는 일종의 불신? 같은 것이 양선형 소설의 읽기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인 것 같고요. 그런 점이 제게는 재미있네요...
정용준
저는 최근 문학 담론에서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당사자성'이 라는 용어와 개념이 실제로 소설작법에 적용되는 방식에 있어서 약간의 우려가 있는데요. 아무리 픽션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작가의 자의적인 상상력과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인물과 사건은 실제 현실을 고려하고 고민되어야 한다는 이 바람직한 철학과 사유가 혹 글쓰기를 위축시킬수도 있을 것 같아요. 더 잘 쓰고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야 할 고민이 자칫 당사자가 아니면 쓸 수 없거나(자격이 없거나) 함부로 쓰면 안된다는 걱정과 우려로 쓰기 자체를 포기하거나 주저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만 민감한 사건이나 인물들(특히 소수자나 장애인들)은 소설 서사에서 등장하지 않거나 표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쓰지 않음으로 잘 못 씀을 예방'하는 이상한 윤리의식이 발동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헌치백>은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과감하게 써주었기에 흥미롭고 의미가 있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당사자가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은 쉽지 않다는 시그널로도 느껴졌어요.
정용준
<헌치백>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이책에 관한 인식이었는데요. 종이책을 이토록 현실적으로 어려워하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해서 굉장히 새로웠습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제 인식속에서 까맣게 없었다는 것에 약간의 반성과 함께 소설이 전해주는 앎과 지식에 새삼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종이책'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자리가 제게 생긴 것 같아요.
정용준
<V섬의 검은 짐승>(이하 V섬)은 지금 열심히 읽고 있어요. 제게는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이 많아서 이야기해볼 지점이 조금 있습니다. 작가의 마음. 소설의 마음. 영화의 마음. 대중서사의 마음. 작가주의의 마음. 등등이 이렇게 저렇게 떠오르면서 제 안에서 이 말 저 말 섞이고 있는 것 같아요. 웃픈 장면도 많고 하이개그(지금도 이런 표현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도 종종 나와서 꽤 재미가 있습니다. 이 부분도 나중에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선발대 분들의 다양한 의견들 이런저런 의견들 저 역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이 참여해주세요!
박혜진
< V섬의 검은 짐승>은 그야말로 추상화처럼 읽게 되는 소설이네요. 모종의 핵심은 공유되지만 구체적인 이해는 제각각 다르다는 점에서요. 일상의 대부분을 관습적으로 사고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저 역시 비선형적인 구조로 전개(어떤 면에서는 전개되지 않는)되는 소설은 읽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쉽게 몰입되지 않는 까다로운 독서를 하게 되면 그만큼 얻게 되는 게 있고, 그 득실의 비중이 저한테는 소설을 평가하는 한 기준이 되기도 해요. 이 소설 같은 경우엔 V섬을 촬영해 영화로 만들려는 감독과 그 감독의 페르소나로 낙점돼 배우로 출연하게 된 소설가의 관계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하고 해석하는 재미가 컸어요. 소설가로서는 영화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또 알고 싶은 생각도 별로 지만 돈 때문에 일단 섬으로 들어가고, 막상 이 판을 짠 감독은 섬에 들 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섬에서는 다양한 존재들을 다양한 국면에서 만나게 되고, 여전히 이 섬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고..
박혜진
제겐 이 과정이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상상처럼 읽혔어요. 내가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나만이 주인공일 수 있는 곳에 초대받았지만 이곳으로부터 환대받는다는 느낌은 없고 어쩐지 소외된 채 화자로서의 역할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제 삶의 실존을 감각으로 옮겨 놓은 것 같았거든요. 저는 이런 제 해석과 의미 부여가 작가의 의도에 썩 부합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의도라는 것이 이미 너무 선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런 의도에 맞춘 해석에 대해서도 얼마간은 자유롭게 생각하는 중이에요. 어쩌면 이런 것이 '문학'에 대한 실존을 체험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면서요. 이렇게 생각하면서 읽어가다 보면 '검은짐승'이란 말로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의 범위가 달라지고 V섬이라는 공간에 대한 개념도 달라지면서 이 소설은 그냥 저의 소설이 되는 거죠. 조금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쓴 특정한 소설을 그림 구매하듯 내가 소유하는 느낌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림 사 본 적은 없지만..
박혜진
하지만 주관적 감상으로만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구체적인 일화들이 '미디어'에 대한 낯선 이해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을 사회적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느껴요. 보원 평론가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지만 그들이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데 그렇듯 모르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상태로 계속해 나가는 데서 드러나는 창작의 역설이 있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건 V 섬을 기록하는 도구의 변화였는데, 상공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카메라, V섬을 활공하는 원격 나그네새를 조정하는 개구리복 남자들 앞의 모니터는 죽은 느낌의 V 섬을 묘사하는 데 비해 검은짐승에 마을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V섬은 살아 있는 느낌이었어요. '검은 짐승'을 기억하는 건 역시 소설에 대한 하나의 비유일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박혜진
작가가 재현하고 있는 현실을 당연이 알게 되는 소설에서 '속도와 몰입'이 미덕이라면 작가가 재현하고 싶은 현실이 뭘지 상상해야 되는 소설에서는 '느림과 불연속'이 미덕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그럼에도 유머러스하고 시니컬한 문장이나 종교적 표현들을 재치 있게 적용한 표현들이 재밌어서 딴청 부리다가도 얼른 다시 복귀해 읽기를 반복했더랬습니다.
범한소
보원 선생님의 V섬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서, 빨리 댓글 달고 싶어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ㅎㅎ 일단 1회독을 마친 상태의 첫 감상은, 속수무책의 독자가 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이네요. 개인적으로 독자로서 소설에 가장 쉽 게 흥미를 잃게 되는 지점은 다음 전개가 예상될 때, 기시감을 느낄 때인 것 같아요. <v섬의 검은 짐승>을 읽으면서는 독자로서 제가 쌓아온 이야기 장악력이 무력해지는 것을 느꼈고, 예측불허의 이야기 속에서 완전히 휘둘리는 경험을 한 것 같아요. 물론 혜진 선생님이 언급해주셨듯, 이런 ‘비선형적 구조로 전개되는 소설’은 필연적으로 몰입을 방해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까다로운 독서를 하게 만드는 탓에 ‘난해하다’는 독해 이상으로 쉽게 나아가지 못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책일수록 복잡한 독해에 보다 익숙한 일종의 가이드 독자들의 역할이 중요할텐데, 그래서 보원선생님과 혜진선생님이 나눠주신 독해가 저에게는 책만큼이나 흥미롭게 여겨졌어요! 보원 선생님이 읽어내주신 ‘글쓰기와 관련된 조건들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는 메타적 소설로서의 해석이나, 혜진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상상”은 제가 읽으면서는 발견하지 못한 부분들이라, 이런 해석들과 함께 소설을 다시 읽으면 훨씬 풍부하게 읽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ㅎㅎ
범한소
제가 이 소설에 가장 사로잡혔던 부분은 개별 일화들의 강렬한 이미지였어요. 환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그로테스크하고 기이한 이미지들이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한동안 일렁이더라고요. 짐승의 사체를 약재로 이용하는 할머니의 한약방, 십자가에 매달린 암퇘지 수아, 우명수 군의 실종과 개들의 왕, 노루 보혈을 마시는 사이비 목사 등등…이런 이미지들이 하나하나 모여 v섬이라는 기이한 공간의 이미지를 완성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환상성이 실현될 수 있었던 데는 단연 작가가 구사하는 한국어 문장들이 바탕이 됐을텐데, 그냥 장광설인가하면 전혀 그렇지 않고, 실은 무척 촘촘하고 세밀하게 직조된 언어들이 v섬을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령,
“중앙 통로 끝의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짐승은 수아였다. 고준경 씨의 불행한 암퇘지, 재생산 노동에 실패하고 완공 기념식의 고기가 되는 일에도 실패한 수아. 수아는 옅은 분홍색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십자가는 인간의 육체에 알맞게 규격화된 장치였기 때문에 이는 수아에게 어울리거나 수아가 감당해야 할 형벌도 아니었다. 십자가야말로 인간만이 탑승할 자격이 주어지는 고문 도구인데, 그곳에서 비천함과 거룩함을 획득해 예배당에 내걸려야만 하는 존재란 깡마른 구세주여야 마땅했다. 그러므로 수아는 사체를 십자가에 억지로 결합시키는 인위적인 조작과 부조리한 재봉질에 의해 끔찍하게 승화된 채, 신성모독적인 정육점으로 뒤바뀐 예배당 한가운데로 솟아오른 십자가 모양의, 단지 십자가 모양일 뿐인 불결한 나무 도마 위에서 절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146~148p)
이런 장면은, v섬에서 예배당이 얼마나 부조리한 공간인지를 알려주는 서사적 기능을 하는 동시에 이 자체만으로도 언어적 유희를 충족시켜줬던 것 같아요. 유희적이면서도 동시에 선언적인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정말 한없이 밑줄을 그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김지운0
양선형 작가의 『V섬의 검은 짐승』의 경우, 저는 무엇보다 작가가 구사하는 일종의 ‘각진 언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만큼 기억에 깊이 남았습니다. 바로 위에서 소범 기자님께서도 “무척 꼼꼼하고 세밀하게 직조된 언어”에 관해 말씀해주셨는데요. 한자 관념어의 사용 빈도가 동시대 한국어 소설 중에서도 유독 높게 느껴졌는데, 그럼에도 문장의 구문이 무척 조직적이고 명료해 유려하게 읽혔던 것 같아요. 이 또한 용준 작가님께서 지난 시즌에 말씀하신 ‘소설의 목소리’의 차원에서 얘기해볼 법한 지점이라고 느껴졌고요.
그리고 다른 분들께서도 말씀해주셨다시피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초반부터 다층적으로 펼쳐지는데, 여기에 작품 내의 영화와 소설(웹소설이나 기타 서브컬처에서 흔히 ‘작중작’이라고 지칭된다고 하는)에 대한 서술이 중첩되면서 현실과 환상, 허구에 대한 구분이 한결 혼란스러워지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또 V섬이라는 고립된 공간 설정, 그리고 이 지역이 겪어온 평탄치 못한 역사 등이 추가로 얽혀서 더 음산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고요. 특히 소설 속 소설이 거론되는 대목에서는 작중 현실과 혼동한 채로 일단 작품을 읽어나갔는데, 나중에서야 그것이 작중 소설의 내용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들이 더러 생기더라고요. 같은 맥락에서 이 작품의 서술자가 주인공인지, 작중작의 서술자인지, 양선형 작가 본인인지를 두고 종종 착란한 상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서술과 혼동은 물론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일 테고 이 소설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체험적 요소의 일종이라고 생각되지만, 더 주의를 기울여 이 작품을 재독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박혜진
양선형 작가의 소설에 대한 감상을 읽다 보니 '모호함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야말로 문학의 밀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양성과는 또 다른 모호함 속에서 소설을 읽는 와중에도 공통된 분위기와 바탕을 공유하는 건 작가가 재현하려고 하는 실체가 언어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통상적인 장편보다 짧았는데도 길이감이 전혀 체감되지 않았던 것도, 서사보다는 언어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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