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자유를 넘어선 세상을...

by 오락가락2023-01-04 22:42:26
한낮의 어둠한낮의 어둠

정오가 가까울 무렵 미적거리며 새해의 신문을 집어들었다. 신문의 1면에는 자유를 위하여 이 시대의 병폐에 대한 외과수술이 집도되어야한다는 높으신 분의 메세지가 아주 큼지막하게 실려있었다. 글씨가 큰 이유는 아마도 그 분을 지지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고령층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덜 늙은 나로서는 높으신 그 분이 최우선 수술대상 아닌가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대의 모순을 지적한다는 무리들이 자기 편을 세상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어디서나 있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신문 기사를 다 읽고 나니 그 분과 그 추종자들이 생각하는 자유와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같지 않으며 그것이 교집합을 가지게 될 순간은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한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소위 고등학교 윤리에서 배운 적극적 자유에 가깝다. 나는 무엇인가를 하기를 원하고 그것에 대한 결과물을 내가 직접 주도하기를 원한다. 물론 그것은 처참한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지금까지의 인생에서는 실제로 실패로 끝났다. 아마 앞으로도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내가' 실패하기를 원한다.


반면 정치인들이 말하는 자유는 계몽주의적 차원에서 논의된다. 백년 전 중국의 지식인이었던 량치차오의 말을 빌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사람은 단체를 떠나 생존할 수 없다. 단체가 자유를 보존하지 못하면 다른 단체가 외부에서 침입해 와서 압박하고 강탈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즉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절단수술을 집행하듯 개인의 자유는 위급한 상황에서는 희생되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있어 즉 개인의 자유란 굴종을 전제로 한 시혜일뿐, 어떤 누군가가 자신과 동일한 존중을 받으며 또 존중해주어야한다는 박애주의적 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높으신 분의 수술계획에 따르면 기득권층은 '귀족'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운 시국에는 말이다. 역사를 돌이켜보건데 사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체적인 경쟁력을 키우는 대신 가공의 적을 상상해내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음모론은 언제나 있어왔다. 1930년대 소련에서 일어났던 일이 이것과 비슷했다. 밖으로는 반공주의를 모토로 삼은 파시즘이 전유럽을 휩쓸기 시작했고 내부에서는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농장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들이 보고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온건파의 주장은 상식적이었다. 범사회주의 혹은 의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립전선을 수립해 파시스트들의 정권 장악을 막아내고 안으로는 중공업 발전의 속도를 늦추어서 국가의 기본적인 경제력을 다시 확충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은 정반대의 노선을 취했다. 우선 사회파시즘이라는 이론을 통해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논리로 파시즘의 발호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겼으며 또한 그들의 주요 지지자들이었던 서유럽의 노동자들과도 결별했다. 어디까지나 우연이겠지만, 당시 소련에서 서유럽 노동조합 간부들을 일컫는 멸칭은 노동귀족(Labour Aristocrat)이었다. 그리고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임이 조직의 부정부패와 기강 이완에 있다고 믿으며 적극적인 사회 단속에 들어갔다. 악명높은 대숙청의 시작이었다.


모두를 대변하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고한 희생자의 발생은 감수해야만 했다. 적어도 숙청을 담당하던 집행자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나치가 그들에게 갈 때 내가 침묵하면 나치가 나한테 올 때도 모두가 침묵하는 법. 숙청의 결과물은 결국 자기 자신마저 해치게 되는 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참으로 기묘하게도 대숙청 시기를 다루던 '한낮의 어둠'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원로당원으로서 활동해온 루바쇼프는 혁명의 대의하에 당의 노선과 대립되는 인물의 파멸을 방관한다. 그러나 당은 결국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마저도 요구하고, 그 죽음의 속도는 자신을 심문하던 옛 동료마저도 죽일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다. 결국 당의 행동을 방관해온 루바쇼프는 자신이 해왔던 인생을 부정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당을 위한 최후의 봉사로 역사의 흐름, 궁극적인 인류(당)의 승리를 위해서 자신의 죽음을 바치기로 마음먹는다. 마음 한 편으로 모든 개개인의 자아가 집결한 하나의 순수한 이상이 탄생할 희망을 품으며, 마음 한편으로는 그러한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최소한 수천년이 넘게 소모될 시간과 그 가능성에 대한 회의를 품은채....


책을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순정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집단은 개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닥칠 때에도 희생은 합리화되는 것일까. 그러한 결정에 거부할 자유는 존재하는 것일까. 개인과 집단이 충돌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유는 이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침묵을 통하여 자유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의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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