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작법서이지만 소설가 문지혁 작가가 번역해서 괜시리 주목을 끈다. 북미권 작법서를 읽는 가운데 급텐션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예시로 드는 영미 소설의 낯섦. 도입부는 나쁘지 않은데 역시나 온갖 예시들을 접하다가 길을 잃었다.
은행나무 (240307~240307)
❝ 별점: ★★★★
❝ 한줄평: 다채로운 색깔을 품은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소설
❝ 키워드: 가정교사 | 파티 | 사냥 | 욕망 | 감시 | 관찰 | 관음 | 시선
✦ 아름답고 매혹적이고 관능적이면서도 동시에 두렵고 섬뜩하기도 한 이야기. ‘시선’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해서 읽으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아요! [📝 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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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이네스가 돌아올 것이다. 셋이서 카드놀이를 할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내일, 아니면 한 달 뒤, 혹은 일 년 뒤, 또 다른 낯선 남자가 그들의 내밀함 속으로, 갑자기 마법처럼 열리는금빛 철문 뒤에 놓인 밤처럼 감미로운 이 덫으로 걸어 들어오게 될지.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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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결국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폭탄이 이 집 위로 떨어져야 삶이 갑작스러운 전환을 맞고, 철문이 활짝 열리고, 나무들이 뽑히고, 집이 자리를 바꾸면서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게 되는 걸까?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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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 전 쯤 참석한 북토크 책을 이제야 읽는데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뒤늦게 캐치하는 맛이 있음. 이를테면 이런 대사랄지~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해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할게요."
"좋아요. 그럼 내일 만나요."
이렇게나 간단하다니!^^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을 보려다보니 전편인 나이브스 아웃을 보다가 말았다는 기억이 들었다. 아나 데 아르마스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재능이란 대체 무언인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화려한 캐스팅인데 어리둥절할 정도로 연기를 못한다. 북미 남성들이 좋아할 법한 것들을 한 접시에 모두 담은 슈퍼볼 같은 느낌.
소설보다 낫고 파트1보다는 아쉬웠다.
김승섭교수님의 책은 단숨에 읽기가 좀 어렵다. 최대한 담담하게, 객관적인 연구결과를 토대로 풀어놓은 글임에도 그 속에 담겨있는 피해자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현재에도 진행형이라는 사실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왜 김승섭교수님의 책을 읽는걸까,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읽어야하는 걸까라고 가끔 생각한다. 이번 책에선 어느 정도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 자체가 그 대답일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 하기"위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아가는 거예요.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라는 김승섭교수님의 말이 그 대답일 수도 있겠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기'때문에 결국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그렇게 이 책을, 김승섭교수님의 책을 읽는 이유를 정리해도 여전히 마음이 개운치 않은건 이 책이 던진 많은 질문이 여전히 온전히 응답받지 못했다는 걸 알기때문일테다.
『이상한 존』의 자매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개이고, 그 개의 지능이 인간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딱 똑똑한 인간 수준이기에 몇 가지 장점이 더 생긴다. 주인공의 처지가 더 처연하게 다가오고, 그의 관점이나 견해도 보다 설득력 있다. 세상에는 나처럼 픽션에 말하는 개만 나오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도 있고. 결말이 허망한 것은 작가도 시리우스에게 어떤 결말을 선사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은 아닐까.
초인을 다룬 최초의 소설은 분명히 아니다. 홍길동도, 전우치도 초인이었으니까. 이 작품의 매력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의 눈에 인간의 사상이나 제도, 문화가 어떻게 보일지 냉담하게 상상해보는 데 있다. 물론 그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의 생각은 인간인 작가가 쓴 것이기에 등장인물의 철학이 작가의 철학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트랜스휴머니즘과 연관 지어도 이야기할 거리가 많을 듯. 실제로 스태플든이 트랜스휴머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한다.